아트 슈피겔만의 '쥐'

일상/도서리뷰|2017. 1. 1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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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화책 유일 퓰리처상 수상작 『쥐 : 한 생존자의 이야기』

만화에 대한 종래의 선입견을 깬 작품!
홀로코스트를 다룬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손꼽히는 만화!


유태인 출신이면서 동시에 유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작가 슈피겔만은 독일의 구겐하임상, 미국의 퓰리처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이 작품에서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대학살 속에서도 살아남은 아버지의 기구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의 이야기 속에서 유태인은 단순한 대학살의 피해자, 나찌는 가해자가 아니다.

사실 이 만화는 두 개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엮은 소설적 구성으로 꾸며졌다. 하나는 죽음의 올가미를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피맺힌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인 아들과 극한 상황을 경험한 아버지가 빚어내는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충돌에 관한 일상이다. 작가는 두 개의 플롯을 긴밀하게 뒤섞음으로써 홀로코스트의 참혹했던 기억을 구체적으로 현재화하는 효과를 창출한다.

*홀로코스트 :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경제적 성공을 바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림을 택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버지를 못 견뎌한다. 그런 아들이 어머니의 갑작스런 자살 후 죄의식 속에서 방황하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아버지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만화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표현 양식을 설계하고 실험적인 기법으로 『쥐』를 탈고하기까지 아트 슈피겔만은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소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슈피겔만은 만화라는 대중문화를 예술적 표현 양식의 하나로 끌어올린 ‘그래픽 노블’의 창시자가 되었다.

또 하나 이 책의 표현 양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유태인이 쥐로, 독일인이 고양이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인류 역사에서 쥐란 동물에게 관대했던 문화는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전세계 다수인들에게 쥐는 당연히 박멸시키고 멸종시켜야 할 해충과 같은 존재, 존재 자체가 ‘악’으로 터부시되어 온 생물종이다. 그래서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인간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쥐의 이미지를 덮씌운 것은 한 인종의 존재를 손쉽게 말살할 수 있는, 인종주의자들의 효과적인 심리전술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이 만화에서 유대인을 쥐로, 독일인을 고양이로 묘사함으로써 사람들이 인종주의자들의 이런 심리전술에 얼마나 무력하게 넘어가는지를 소리 없는 웅변으로 증명한다. 『쥐』가 전하는 메시지가 단순히 나찌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과거 사건이나 생존자들이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개인사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상대의 존재를 말살시키려는 모든 경우―지금도 전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에 해당되는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2. 이 책의 내용

주인공 ‘블라덱 슈피겔만’은 2차 대전이 발발할 당시 독일 국경에 인접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도시 체스토초바에서 직물매매를 하던 미청년이었다. 그 즈음 블라덱은 폴란드의 백만장자 질버베르그의 딸과 결혼해 소스노비체츠에 있는 처가로 옮겨간다. 『쥐』는 블라덱과 아내 아냐 질버베르가가 소스노비에츠에서 아우슈비츠까지 영락해간 세월을 따라 진행된다.

이 책은 폴란드 부호 일가의 영락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지옥의 문턱에 섰을 때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또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고한다. 여느 홀로코스트 보고서에 견주어 『쥐』가 이룬 주요한 성과는 탁월한 사실성과 객관성에 기인한다. 『쥐』는 소스노비에츠에서 아우슈비츠까지의 행로에 절망과 죽음의 사례를 즐비하게 제시한다.

만행의 집행자는 비단 나치뿐만이 아니었다.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의 여러 인종들이 앞 다투어 유태인 사냥의 주구 노릇을 했음은 물론, 유태인 스스로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동포를 고발하고 살해했던 것이다. 심지어 돈벌이를 위해 인신매매를 자행한 사례도 드물지 않다.

아트 슈피겔만은 이 피의 역사를 그리는 동안 철저하게 객관적 자세를 견지한다. 작가는 만행이나 피해의 정도를 강조하기 위해 피의 현장을 가공하지 않고, 나치의 광기와 다른 인간 군상의 비열함을 들은 그대로 그리고 있다.

그는 『쥐』에 의도적인 메시지가 담길 것을 애써 경계한다. 그 결과 작가는 인간애에 대한 눈부신 성찰을 책 안에 배태시키는 가외의 성과를 얻는다. 인간이 인간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인간 이하로 전락하기 쉽다. 삶의 진실은 아비규환의 혼돈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애틋한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블라덱 내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는다. 그렇지만 생존의 의의는 무엇이었는가. 블라덱은 생존의 정당성을 입론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끝내 답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블라덱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그의 재빠른 처세술 덕분이었다. 수용소 관리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일신의 안전을 꾀하기도 했고, 몸이 튼튼한 유태인과 재빨리 짝을 지어 남들 대신 살아남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몇 차례 선심을 베푼 경우도 언제나 그 보답을 계산에 넣고 행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블라덱 내외는 스웨덴에 임시 체류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평화의 시대에 발아한다. 이들 가족의 생활은 내내 악몽의 연속이었다. 급기야 아들 아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아내 아냐는 자살한다.

비극의 씨앗은 블라덱의 내부에 있었다. 미국에서 블라덱은 여전히 아우슈비츠 시절의 사고와 행동양식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매일 길거리에서 철사며 나사못(한때 생존에 유용했던 것들)을 주워 모으고, 아무도 믿지 않고 왕래도 없이 자린고비로 살아간다. 또한 끊임없이 가족에게 (생존에 성공한) 자신의 생활방식을 강요하며 잔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사실 동유럽 출신으로 대학살을 경험한 아버지와 자유분방한 미국 뉴욕의 히피였던 아들은 아버지가 과거 이야기를 하는 동안을 제외하고 지금 현재의 모든 문제들에서는 타협할 수 없는 끝없는 평행선에 서 있다. 그러나 아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의 그 같은 현재 모습들은 다른 한편에서는 아우슈비츠의 경험이 만들어낸 모습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의 지옥에서 살아남았지만, 또한 “살아남지 못했다”는 이런 과거의 ‘현재화’는 아버지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인 저자에게도 ‘해결할 수 없는 숙제’로서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인간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과거가 자신과 그 후대에 어떻게 현재성으로 살아남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전 동안 죽은 부모님 침실에 걸린 사진으로 존재하는 친형과 끊임없이 비교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면서 성장하는 아들, ‘살아남는 기술’에 무능력하다는 아버지의 비난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던 아들, 무엇보다 아버지와 경쟁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가 간섭할 여지가 없는 예술을 택하는 아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동종의 집단’임을 은연중 강조하는 유태인 친척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아들. 작가인 아들의 이런 모습들은 아버지의 경우와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긴 하지만 ‘부정의 모습’, ‘거부의 모습’으로서 과거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현재성이다.

아트 슈피겔만도 부모와 함께 아우슈비츠의 후유증에 시달린 것이었다. “나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갈 때까지, 세상의 모든 부모가 한밤중에 악몽으로 비명을 질러서 아이를 깨우는 줄만 알았다”는 저자의 증언은 마지막까지 여운을 남긴다.

내용상으로 볼 때 [쥐]가 그려내는 모습은 여기까지다. 결국 아버지도 아들도, 그리고 인류의 현재 또한 과거를 올바르게 청산하지 못한 상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덮으며, 단순히 과거사에 대한 이해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우리 모습은 어떤 상태인지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3. 이 책에 보낸 세계의 찬사

“『쥐』는 진정 잠들 때까지 내려놓을 수 없는 책이다. 두 쥐가 사랑을 이야기할 때면 당신은 감동하고, 그들이 고통을 받을 때 당신은 울게 된다. 고통, 유머, 그리고 삶의 일상적 시련을 담은 이 책은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당신은 어느 동유럽 가족의 언어에 서서히 매료되고, 그것이 주는 부드럽고 최면을 거는 듯한 리듬에 이끌려 들어갈 것이다. 『쥐』를 다 읽고 나면 그 마술의 세계를 떠나는 아쉬움으로 가만히 한숨지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기록문학적 세부묘사와 소설의 생생함을 갖춘 괄목할만한 업적이자… 신비롭게 펼쳐지는 문학적 사건.” “작은 네모칸 그림들로 표현된 한 편의 서사시.”
-뉴욕타임스

“지금껏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야기되어졌던 것들 중 가장 감동적이고 성공적인 회고담.”
-월스트리트 저널

“찬사에 어울리는 책은 너무도 드물게 나온다. (이것이) 그런 책이다.” -에스콰이어

“우리를 소름끼치게 만든 건 그 잔혹성 때문이 아니라, 그 스멀스멀 스며드는 죄책감 때문이다.”
-뉴요크

“만화 외의 그 어떤 매체로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었고, 성취할 수 없었던, 감동적이면서 단아하고 조용한 승리.”
- 워싱턴 포스트

“개념과 실행단계에서 이미 전율을 안겨준 놀라운 작품으로, 장편소설인 동시에 다큐멘터리이고, 자서전인 동시에 만화이다. 눈부시다. 눈부실 뿐이다.”
-쥴스 파이퍼

“[쥐]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방식으로 증인이 되도록 한다. 그 표면의 작의성 자체가 그 밑의 현실성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뉴스위크

“참혹하리 만큼 감동적인 예술작품… [쥐] 2권에서 아트 슈피겔만은 그의 명작을 마무리짓고 있다. 당신은 개인적인 고통을 담은 행위가 지속적인 진실로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지 (나아가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스턴 글로브

“슈피겔만은 [쥐]를 통해 만화책을 재창조하였다.”
-로렌스 웨슬리

4. 이 책에 대한 국내 서평

“아픔과 진지함으로 일관된 역사와 인간에 대한 진실!
만화라는 양식 속에 담을 수 있는 내용에 대하여 우리는 대체로 일정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통상적인 인식을 정면에서 거부하는 작품이 바로 아트 슈피겔만의 『쥐』이다.
내가 이 책의 초역된 원고를 처음 펼쳐 들었을 때, 맨 먼저 받은 충격은 만화라는 양식에 대한 나의 반성이었다.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곧 이어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아픔과 진지함으로 일관된 역사와 인간에 대한 진실이 우리의 것, 나 자신의 것으로 치환되면서 가슴 아픈 전율로 다가왔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우리의 상투화된 인식체계를 그 내용과 형식면에서 통렬히 반성케 한다.“
-신영복

“‘우리나라식’ 만화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만화는 조금 생경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어가면서 만화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만화의 엄청난 위력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쥐』에서 작가가 처절하게 부르짖는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간의 이해와 공존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도 남의 얘기만은 아니다.”
-이원복

나치 치하 유태인들의 고난을 회상 형식으로 묘사한 만화다. 죽음이 항상 어른거리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아픔이 각인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92년 퓰리처상(도서부문)과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등을 받았다.
-조선일보

“죽음의 수용소에서 풀려난 지 26년이 지나 자살을 선택한 어머니와 아직도 매일 밤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는 아버지. 『쥐』가 만화라는 장르의 한계를 넘어 독자들 사로잡은 이유는 기적과 같은 생존을 부각하지 않고 기적을 이루지 못한 수많은 죽음을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 전편에 걸쳐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한국일보

“유대인을 쥐로, 나치를 고양이로 묘사하고 있는 [쥐]는 단순한 회고담에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 전개 중간에 재혼한 아버지가 현재의 후처와 겪는 갈등, 전후세대 아들이 앞 세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갭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 등에 대한 적절한 가미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현재의 이야기로 끌어올리고 있고 독자들은 강렬한 지적 체험을 하게 마련이다.
특히 복잡한 현대사를 살아온 국내 독자들에게는 우리 얘기로 읽힐 수도 있다. 한편 [쥐]는 작가가 무려 14년간이나 공을 들여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퓰리쳐상 외에도 미국도서비평가협회상 등도 받았다.“
-문화일보

“만화에 대해 ‘연극보다 유연하고 영화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고 말해온 작가는 나치 독일인을 고양이로, 유대인을 쥐로 단순화함으로써 이 끔찍한 인류의 재앙으로부터 독자와 작가 자산을 객관화하는 데 성공했다. 증오와 동정심, 적대감 등 일차적인 감정에서 다소 떨어져 모든 경험을 일반화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만화라는 점에 흥미를 느껴 이 책을 집은 사람들은 새로운 형식과 처절한 내용에 충격을 받을 터이고, 가슴 저미는 소재에 끌려 이 책을 고른 이들은 만화라는 양식에 이토록 진지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경탄할 것이다.“
-한겨레신문

“『쥐』는 만화 중에서도, 1970~80년대 미국의 대안만화(얼터너티브 코믹스) 혹은 그래픽 노블이라고 불리는 장르이다. 좀 어려운 말 같으나 문자 그대로, 주류에 반하여 나타난 대안만화이기도 하고, 그림으로 풀어낸 소설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겪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단행본 2권 정도 분량을 위해 13년에 걸친 현장조사와 스케치, 고도로 정밀한 미학적 계산, 즉, 통밥 아래에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직접 책장을 넘겼을 때, 일견 투박해 보이는 그림체나 연출이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 얼마나 지적이고 미학적인 짜임새로 다가오는지  독자들은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를 봤을 때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뭔지 낯설고 서툰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볼수록 매력이 느껴지는……
본 우원 『쥐』를 보면서, 다음 세대에게 역사의 진실을, 윗세대의 고통을 전할 때는 이러해야 한다고 참으로 느꼈다. 결코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냥 보여주는 것. 담담하게 보여지는 그 삶 속에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웃기도 하고, 사랑도 하면서 결국엔, 결국엔 살아간다는 것. 그렇기에 고통을 견뎌내는 타인의 모습을 두려움을 아니라 따뜻함으로 이해하기 전에는 타인이 자신의 불행을 껴안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선동가들은 구호로 사상을 설명하지만, 예술은 다만 삶으로 보여준다. 이후 사상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각자의 자유다.“
-[딴지일보 양서추천위원회]

“말랑말랑한 장르라 여겨졌던 만화로 이토록 리얼한 고통과 감동을 전이받을 수 있다니. 허섭쓰레기 같아 보이는 삶의 무의미성과 다툴 때, 이 책을 펼쳐 보라. 끔찍하도록 날것인 목숨의 진지함에 직면하게 된다. 아우슈비츠와 노골적으로 닮았던 한국 현대사의 날선 모서리들, 여전히 눈뜨고 바라보기에 버거운 고통의 땅 팔레스타인,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
참혹한 과거사는 아우슈비츠만이 아닐 것이다. 이 ‘피의 역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아직도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는 이 행성에서 인류의 조화와 공존은 다만 희망인가.“
-[엄마는 아이에게 배운다]의 저자 김혜형

“[쥐]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것이 단순히 유태인과 독일인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말일까? 아니다. 상대방을 해충으로 보고 마당히 죽여야할 대상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심리적인 매커니즘은 현재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다. 종북이, 좌빨, 좌좀, 홍어, 일베충, 꼴보수 등등.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해충으로 보고 반드시 박멸시킬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가? 상대방에 대한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상대방은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요, 해충으로 취급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변호인이라는 영화에서, 남영동이라는 영화에서 우리가 그렇게 불편하게 느꼈던 모습들이 어느새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지 않은가??
일베충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일베를 벌레처럼 여기고 있지 않은가? 좌좀이라는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괴물이요, 제거해야할 쓰레기로 치부해 버리고 있지 않은가? 선교나 성지 순례를 나간 사람들이 당한 비극을 바라보면서 "잘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일인가? 안현수를 빅토르 안이라고 부르면서 변절자요 배신자라고 욕하는 것, 축구 선수를 보면서 기레기, 밥줘라고 부르면서 비하하고,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 보다는 찧고 까부는 모습을 보면서 쥐와 도대체가 무엇이 다른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고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면서 꼼짝도 하지 않는 노조를 보면서 이미 한국은 마우슈비츠로 가고 있지 않는가라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
- 알라딘 독자의 마이리뷰 ‘이달의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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