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야기

일상/다양한이야기|2017. 12. 9. 16:59
반응형

요 근래 세계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는 동생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관심 때문이였다. 나는 경제와 자본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 친구는 정치와 역사에 대한 지식과 흥미를 가지고 있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역사와 정치 경제로까지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그 중에서 얼마전 트럼프가 선언한 [예루살렘 수도 선언]과 관련해 그 친구가 정리해 놓은 내용을 보다 조금더 자세한 배경을 알고 싶다는 마음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살짝 들여다 보았다.

우선 나는 개인적으로 꽤 오랜기간 교회를 다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상당히 익숙한 나라이고 관련된 역사에 대해서도 성경을 통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난 정말 쥐뿔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우선 아는 동생이 다뤄준 이스라엘이야기는 역사와 더불어 현재 왜 트럼프가 [예루살렘 수도 선언]을 왜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뤄줬는데 근본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어떤 역사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가 추가적으로 궁금해져 네이버를 검색했다. 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퀵하게 네이버 백과사전을 통해 맥락을 살펴보았다.

이스라엘 역사

1. 선사 시대

이스라엘 지역의 고대 지명은 가나안이며, 이곳에 살던 원주민인 가나안족은 기원전 7천 년경부터 농경을 시작하였다.
가나안족은 기원전 3천 년경 청동기 시대부터 셈족, 히타이트족 등 여러 민족의 침입을 받았는데, 이것은 가나안 지역이 고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위치하여 두 문명이 자주 충돌했기 때문이다. 가나안은 기원전 13세기까지 주로 이집트의 통치를 받았다.

2. 이스라엘 왕국의 성립과 분열

기원전 2천 년경 아브라함이 이끄는 히브리족이 가나안에 정착하지만, 엄청난 기근 때문에 이집트의 나일 강 하류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1300년경 모세가 이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이끈다. 이후 히브리족은 가나안족과 싸우며 점차 영토를 넓히는 한편, 북쪽에서 내려온 팔레스티나(블레셋)족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다. 결국 다윗 왕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이집트 변경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다스리는 강대국이 되었고, 뒤를 이은 솔로몬 왕은 왕국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여,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죽은 뒤 이스라엘은 왕위 다툼으로,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게 된다.

3. 강대국들의 지배와 하스모니아 왕조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 왕국에 의해 멸망한다. 바빌로니아 왕국은 남유다의 백성을 본국으로 끌고 가 노예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히브리족을 유다 사람들이라는 뜻의 유대인이라 부르게 된다.
유대인은 기원전 538년에 바빌로니아 왕국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칙령에 따라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아온다. 이후 이스라엘 지역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알렉산더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원전 129년에는 유대 국가인 하스모니아 왕조가 세워져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4. 로마의 지배

기원전 63년 이스라엘 땅은 로마 제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된 헤롯 1세는 성전을 다시 짓고 마사다 요새를 세우기도 했지만, 대중의 신임은 얻지 못했다. 이 시대에 베들레헴에서는 예수가 탄생하였고,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였다. 헤롯 1세가 죽은 뒤 이스라엘 땅을 직접 통치한 로마가 유대인의 관습과 종교를 인정하지 않자, 이에 유대인들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132년경에 유대인의 반란이 모두 진압되며, 이후 로마는 이스라엘 땅의 이름을 유대인이 싫어하는 팔레스티나족의 이름을 딴 팔레스타인으로 바꾸고 유대인들을 추방한다.

5. 동로마 제국과 아랍의 지배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게 된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공인하여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 등의 기독교 성지에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7세기경에는 이슬람교 세력이 이 지역을 점령하였고, 그 뒤로 약 4백 년 동안 아랍 왕조의 지배가 이어졌다. 그 사이 알 악사 사원 등 많은 이슬람교 사원이 세워지며,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에 버금가는 이슬람교의 성지가 되었다.

6. 십자군 원정 시대

십자군 원정은 성지 팔레스타인과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의 손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주장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모인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나 곧 무슬림의 반격을 받아 후퇴하였고, 이후 13세기까지 여덟 차례나 이어진 십자군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 원정으로 유럽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교통로가 열리며, 많은 유대인들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7.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이집트에서 일어난 맘루크 왕조는 1291년 십자군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이들은 십자군이 세운 각지의 교회들을 파괴하고 많은 이슬람 사원과 학교를 지으며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정치적 혼란과 빈곤, 질병 등으로 쇠퇴하여 1517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예루살렘과 가자, 갈릴리 등지에 모여 살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핍박이 줄어들어, 유대인의 이주가 늘어났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철도와 도로가 정비되어 대륙과 대륙을 잇는 지리적 이점이 살아났고, 1880년 이후로 더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 와 1500년대에 5천 명에 불과했던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때 8만 5천 명에 이른다.

8. 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통치와 이스라엘 건국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고, 1917년 승전국 중 하나인 영국이 국제 연합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는다. 같은 해 영국이 밸푸어 선언으로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지지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한다.
1930년대에는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더욱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지만, 먼저 이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땅의 소유와 성지 관리 등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난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농토를 개간하고 사해 광물질을 개발하는 등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쌓았고,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어떤 곳인가?

서아시아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구역인 5,655km2의 웨스트뱅크(West Bank)와 남서단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362km2의 가자지구(Gaza Strip)를 가리킨다. 면적은 약 6,017km2이다. 천연자원이 거의 없으며, 요르단강 서안의 동부는 황무지인 반면, 서부는 경작지나 목초지대가 있어 농축산물이 생산된다. 또한 가자지구는 일부 경작지에서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으나, 목초나 삼림지대는 거의 없다. 강수량이 매우 부족하며 이마저 대부분 증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인구 구성은 팔레스타인계가 대부분이며, 유태인은 극소수이다. 주로 아랍어를 사용하지만, 히브리어와 영어도 널리 통용된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종교는 이슬람교 97%, 유태교 등 기타 종교를 믿기도 한다.

현재 가자지구는 무장정파인 하마스의 칼레드 마샬 수반이 통치하고 있고, 서안지구는 파타당의 마무드 압마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이 통치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출범 이후 1988년 11월 독립을 선언하고 1993년 9월 오슬로협정으로 정식 출범하는 등 국제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대표기구로 인정받아 왔으나, 2006년 6월 가자지구 총선에서 강경파인 하마스에 패함으로써 서안지구만 통치하게 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 출처: 시사상식사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구분
가자지구        
서안지구      
주요 내용
· 하마스(Hamas)가 장악, 지도자는 칼레드 마샬
·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것이 목표
· 「형제 간 전쟁」으로 가자지구에서 파타를 몰아냄         
· 파타(Fatah)가 이끄는 자치정부
· 2004년 아라파트 사망 후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취임
· 이스라엘의 존재를 용인함         
인구
약 160만        
약 250만

웨스트뱅크의 경제적 활동은 1994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체결된 파리경제의정서에 따라 통제되었다. 이스라엘의 폐쇄 정책과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치안위협사태의 책임을 물어 국경을 봉쇄한 이후 경기가 악화되었다. 실업률은 지난 1980년대 5% 미만이었던 것이 1995년에는 20%까지 증가하였다. 1990년대 후반 이스라엘의 포괄적 봉쇄의 강도가 약해지면서 경기가 회복되는 듯 했으나 2000년 들어 팔레스타인에 의한 폭력사태가 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대한 봉쇄 정책을 더욱 강화, 무역과 노동력의 이동에 심각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2011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2232달러, 경제활동인구 대비 실업률은 25.8%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유대인들이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운동에 따라 고대 조상들이 살았던 이 지역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2000년간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으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현재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2011년 10월 31일에는 유네스코(UNESCO)로부터 유엔 산하기관 최초로 정회원 국가 지위를 인정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유네스코 회원국 가입을 반대하며 나섰고, 유네스코에 재정을 지원하던 미국은 지원 중단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스라엘과 미국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2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이 유엔 총회에서 옵서버 국가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전까지 유엔 비회원 참관(observer) '단체(entity)'에서 참관 '국가(state)'로 승격되어 독립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정착촌 확대 건설과 1994년 체결한 파리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정부를 대신해 징수한 세금에 대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의 송금 중단으로 맞섰다.

‘예루살렘’ 어떤 곳이길래 국제 화약고 됐나?

크게 2가지 이유로 설명 된다.  

먼저 종교적인 측면이다.

예루살렘은 서예루살렘, 동예루살렘,올드시티 등 3지역으로 나눠져 있다. 이 가운데 올드시티는 예루살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기독교 구역, 이슬람구역, 유대구역과 중립지역 등 모두 5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이 곳에는 기독교의 성지인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라잃은 슬픔으로 통곡했다고 알려진 유대교의 성지인 통곡의 벽, 그리고 이슬람 성지자 마호메트가 승천한 곳에 세워진 바위의돔 사원이 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3대 종교의 성지가 몰려있다보니 종교적 긴장감이 늘 가시지 않는 곳이다.  

두번째로 예루살렘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의 화약고 역할을 해왔다.

분쟁의 시작은 1차세계대전 당시인 1917년인데 당시 영국이 유대인의 이스라엘 정착을 지지하는 벨푸어 선언을 하면서 유대인들이 대거 이민을 오기 시작했고, 수천년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갈등이 시작됐다. 그래서 1947년 UN은 예루살렘을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않는 지역이라고 발표했는데 1967년 이스라엘이 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뒤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하면서 분쟁은 더 가열됐다.

그러다가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2국가 해법에 합의했지만 분쟁종식을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불안과 긴장감이 끊이지않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기존의 중립입장을 버리고 이스라엘 편에 섰으니 국제사회가 강력하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적 흐름을 보면 보다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 친구가 정리해준 역사와 정치와 관련된 내용을 보고 추가적으로 궁금한 사항은 이렇게 정리하면서 공부하려 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