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시성> 후기(2018, ★★★)

일상/영화리뷰|2018. 9. 2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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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루키마인드입니다.

영화<안시성>은 역사 속의 안시성 전투를 담았습니다. 서기 645년 당태종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고 당시 안시성의 군사는 5천 명이었으나, 88일간 성주와 성민들이 힘을 합쳐 성을 사수함으로써 세계 최강의 군대를 물리친 승리의 역사이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의 정사에는 성주의 이름도 나와 있지 않으며, <열하일기> 등을 통해 양만춘의 이름이 전해질 만큼 기록이 허술합니다. 영화는 이처럼 간략한 기록의 행간에, 상상력으로 빚어낸 실감나는 전투 장면들을 채워 넣었습니다.

솔직히 이번 영화를 통해 안시성과 양만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연개소문에 대해서도 재해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드라마나 역사서의 일부분만을 알고 있었던 터라 연개소문은 그야말로 고구려의 영웅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왕을 시해한 것은 처음알았던 내용이라 이부분에 대해 좀 찾아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적 재미보다는 역사적 배경을 궁금하게 만들었던 영화 <안시성>이였습니다.

연개소문은영류왕을 시해했는가?  

고려 중모왕(추모왕)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에 1000년 동안 다스리려고 했다. 모부인(유화부인)이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불가능하다. 단지 700년 치세라면 적당하다”고 하였다. - <일본서기>

고구려는 오랜 세월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해온 나라다. 중원의 농경제국, 초원의 유목제국들이 단명한 것과 달리 고구려는 대단한 장수를 누렸다. 고구려가 존재할 당시 중원에서는 무려 35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모든 국가들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고구려도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멸망 직전까지 전성기를 누렸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당나라의 대군을 거듭 격파하는 위력을 과시하던 나라였다. 그 때문인지 유독 고구려 멸망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논란의 중심에는 늘 연개소문이 있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은 연개소문을 임금을 죽인 역적으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를 위대한 혁명가로,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제1인자로 평가했다. 그의 리더십은 어떠했고, 무엇이 문제였을까?

642년 음력 9월 연개소문은 180여 명의 대신들과 더불어 영류왕마저 시해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는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왕이 아닌 자가 최고 권력자가 된 비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시작된 것이다.

영류왕은 대외정책에 있어서 전쟁보다 평화를 우선하는 정책을 펼친다. 수나라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구려를 위해 단기적으로는 긍정적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거듭된 당과의 외교 관계에서 일방적인 양보를 거듭하게 되자, 고구려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그는 631년 고구려가 수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물인 경관을 당나라 사신이 와서 허물어 버리도록 놔두었다. 또한 640년 당나라에 태자를 사신으로 보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고구려인들에게 외교적 굴욕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641년 당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와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내부 정보를 수집해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는 의지를 노골화하는 와중에도 영류왕은 외교적 해결만을 고집했다. 반대로 대당 강경책을 내세운 연개소문 일파를 제거하려고도 했다. 결국 영류왕의 대외정책에 대한 내부의 불만이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626년 영류왕은 당의 요구에 의해 신라 정벌을 중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643~644년 당나라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라를 공격해 고-수 전쟁 당시 신라에 빼앗긴 500리 땅을 회복하고자 했다. 643년부터 연개소문은 당나라에서 온 사신을 냉대했고, 심지어 사신을 굴에 가두는 등 당나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당나라 사신을 엎드려 기어가게 하여 보장왕에게 절하도록 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고구려의 자존심을 되살리려는 행동이었다. 돌궐, 수나라 등을 거듭 격파하며 강대국의 위상을 과시했던 고구려인의 자존심에 부응하는 그의 정책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가 있었다.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칼둔(1332~1382)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집단 연대의식’을 의미하는 ‘아싸비야(asabiya)’라는 개념을 제시했었다. 그는 아싸비야를 왕조를 탄생시키고 유지하는 힘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는 아싸비야가 증가할 수도 있지만 쇠퇴할 수도 있고, 이에 따라 왕조의 운명이 변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아싸비야 개념을 연개소문 정권에 대입해본다면, 연개소문에게는 권력 유지를 위해 당나라에 강경 대응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축출한 영류왕의 정책과 반대되는 정책을 앞세워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연개소문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했다.

ㅣ <안시성> 내용 중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은?
  
영화에도 당연히 적지 않은 허구가 담겨 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4가지 허구에 대한 이야기만 준비했다.
 
우선, 당시 정세를 실제보다 긴박한 분위기로 다소 과장해 묘사했다. 안시성만 무너지면 평양성이 곧바로 위험해지는 절체절명 상황에서 안시성 전투가 벌어진 것처럼 긴박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안시성이 무너진다고 곧바로 평양성이 위태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사연구소가 발행한 <한국 군사사> 2권의 한 대목이다. ( ) 괄호 속 내용은 <한국 군사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고, [ ] 속 내용은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이 기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다.
  
"개모성·요동성·백암성·비사성 등이 차례로 당군[당나라 군대]의 손으로 들어감으로써, 이제 요하 선[요하 연변 방어 라인]에 배치된 고구려군의 주요 거점 성[城]은 신성·건안성과 안시성만 남게 되었다. 이에 당군은 안시성으로 밀려들었다. 안시성이 무너지면 오골성(지금의 요녕성 봉성 봉황산산성)을 제외하고는 당군의 평양성 공격로를 막을 만한 방어선이 없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안시성과 평양성의 중간쯤인 오골성이 '다음 타자'로 나서게 돼 있었다. 안시성이 무너진다고 평양성이 곧바로 위험해지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인들이 느꼈을 위기감은 영화 <안시성>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위기감보다는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실권자 연개소문과 안시성주 양만춘의 적대관계가 외세와의 투쟁에 영향을 주었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 역시 실제 역사와 다르다. 영화에서는 연개소문(유오성 분)이 당나라군을 목전에 둔 양만춘(조인성 분)을 암살하고자 학생 전사인 사물(남주현 분)을 파견했다고 말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고구려 편)에도 설명됐듯이, 642년 연개소문 쿠데타 때 양만춘이 지지 선언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연개소문도 고구려인이고 양만춘도 고구려인이다. 둘은 평화 시에는 싸웠지만, 외세 앞에서는 단결했다. 이들의 주적은 서로가 아니라 외세, 당나라였다. 영화에서 안시성 전투에 앞서 짤막히 보여준 주필산 전투가 바로 그 증거다.

영화 속에서 연개소문 측은 '양만춘이 연개소문에 대한 미움에 사로잡혀, 안시성 근처에서 벌어지는 주필산 전투를 돕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비난을 할 이유가 없었다. 주필산 전투는,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보호하고자 대규모 구원병을 파견한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의 고구려 열전은 안시성 전투 직전의 주필산 전투에 관해 이렇게 서술한다.
  
"태종이 안시성에 당도하자, 북부누살 고연수와 남부누살 고혜진이 고구려·말갈 병력 15만 6천 800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하러 왔다."
 
외세 앞에서 고구려는 내부의 갈등을 덮고 일단은 단결했다. 15만 군대가 안시성을 구할 목적으로 출동한 것은 그 때문이다. 중앙 정권과 안시성이 그 와중에도 갈등을 빚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외에 <해상잡록>이나 <갓쉰동전> 같은 책들까지 참고해 연개소문 시대를 설명한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는, 안시성 전투 직전에 연개소문이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다음과 같은 작전 지시를 내렸다고 말한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양공께서는 출전하지 말고 성을 지키십시오. 적들이 굶주리게 될 때, 양공께서 안시성 안에서 공격을 개시하고 추공께서 밖에서 공격하면 됩니다. 나는 뒤에서 당나라 군대의 후미를 습격해 그들의 퇴로를 끊어버리고 이세민을 사로잡고자 합니다."
 
영화 속의 연개소문 측은 양만춘이 주필산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욕했지만,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그것은 연개소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외세 앞에서 사적 감정을 억눌렀다.
  
영화에서는 당태종이 화살에 맞아 시력을 상실하고 공들여 쌓은 토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의욕을 상실한 상태에서, 연개소문이 사물의 설득을 듣고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은 뒤 구원군을 보냈기 때문에 당나라 군대가 급히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협력은 안시성 전투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전투가 끝날 무렵 연개소문이 잘못을 뉘우치고 양만춘에게 협조했으며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돼 당태종이 철군을 결심하게 된 것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당태종이 철군을 결심한 최대 동기는 날씨와 보급 문제였다. 토산 붕괴로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날씨가 쌀쌀해지는 데다가 군량미가 부족해진 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의 지시대로 양만춘이 장기전을 펼친 게 주효했던 것이다.
 
안시성 전투 직전의 긴박함이 과장됐다는 점, 전투 당시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엇박자를 보인 것처럼 묘사했다는 점, 당태종의 철군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에 이어, 4번째로 설명할 영화 속 허구는 당나라 군대의 철군 모습이다.
     
 <안시성> 속의 당나라군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으며 정신없이 도주했다. 하지만, 두 군대의 '작별'은 실제로는 아름다운 편이었다. 고구려 본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성주[양만춘]가 성에 올라 송별의 예를 보이자, 당 황제[이세민]는 성을 굳게 지킨 그들의 충심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주면서 그 임금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패배한 당나라군을 상대로 양만춘은 "잘 가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이에 대한 사례로 당태종은 비단 100필을 보내면서 "당신들 정말 대단하다"는 식으로 답례했다.
 
이 전투의 마지막은 이렇게 형식상으로나마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아름다운 작별'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다. 그 작별과 함께, 눈에 붕대 감은 당태종은 치욕과 분노를 삭이며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려야 했다.

ㅣ 영화 '안시성'이 주는 메세지

첫째는 지는 싸움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만춘은 사물에게 “넌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느냐”고 묻는다. 승산이 있어서가 아니고, 물러설 수 없기 때문에, 지켜야할 것이 있기 때문에 싸운다는 뜻이다. 고구려의 신도, 연개소문도 안시성을 버렸다는 말은 패배할 것이 뻔 한 미래를 확인해준다.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투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옳기 때문이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승산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에 양만춘과 성민들은 끝까지 하나가 되어 싸울 수 있었다. 또한 공동체를 위해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토산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기 죽음을 재촉하는 도끼질을 해대던 성민들의 모습은 뭉클하다. 이것을 ‘국뽕’이니 민족주의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고구려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부터 안시성이라는 생활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누구를 따르느냐가 아니라 백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왜 연개소문을 따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양만춘은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답한다. 고대나 중세의 장수가 누구를 주군으로 모시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양만춘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백성을 살리는 것이라 말한다. <명량>의 이순신이 그러하듯이, 임금을 향한 충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충을 보여준다.

셋째는 사소한 반목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다. 양만춘과 연개소문의 갈등은 언뜻 지자체와 중앙정부 혹은 중앙정치 사이의 갈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 사이에 사소한 갈등이 있더라도 생존과 대의 앞에서 화해할 수 있다. 누가 누구를 따르는지 보지 말고, 누가 얼마나 국민과 주민을 위하는지 봄으로써, 진정한 이해와 화해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수십만 대군에 둘러싸인 고립된 성이라는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남한산성>을 떠올리게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인 선택을 하다 끝내 절망적인 굴욕을 맞았던 <남한산성>의 결말은 한없는 무력감을 안겼다. 반면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최고의 리더십을 통해 하나 된 성민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으로써 신탁과는 다른 운명을 맞는 <안시성>의 결말은 얼마나 큰 용기를 안기는가. 더 많은 저항의 서사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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