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당> 후기(2018, ★★★)

일상/영화리뷰|2018. 10. 1.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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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루키마인드입니다.

영화를 보고나면 바로바로 리뷰를 쓰곤 했는데 추석연휴와 주말에 개인적인 일정때문에 본의아니게 몰아서 쓰게 되네요. 아직 영화 <협상> 리뷰도 써야하는데 말입니다. 우선 영화 <명당>을 보고 들었던 생각은 요즘 서울 부동산과 내용은 다르지만 상당부분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를 입지로 보는데 영화에서 나오는 '명당'도 그야말로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입지와 비슷한 개념이니 말입니다.

풍수지리는 땅의 성격을 파악하여 좋은 터전을 찾는 사상으로, 산수의 형세와 방위 등의 환경적인 요인을 인간의 길흉화복과 관련 지어 집과 도읍 및 묘지를 가려 잡아야 한다는 세계관을 말한니다. 삼국시대 때 도입된 풍수지리는 고려 시대에 전성기를 이루며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고려의 도읍지인 개경과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은 풍수지리 입장에서 보면 거의 완벽한 명당자리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수의 중요함은 비단 과거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현재까지도 풍수지리에 근거를 둔 가장 좋은 땅, 즉 ‘명당’을 믿고 풍수지리로 인해 인간의 운명까지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 생활에 깊숙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ㅣ '명당' 박희곤 감독은?

' 명당' 은 기획 단계부터 11년이 걸렸고 박희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입니다. ‘인사동 스캔들’을 통해 신선한 소재와 반전이 거듭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퍼펙트 게임’에서는 기존 스포츠 영화들이 보여 온 방식을 과감히 탈피했던 박희곤 감독은 ‘땅’을 소재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작품인 '명당'을 스크린에 걸게 되었습니다. 필로그라피를 보니 지금까지 총 6개의 작품을 내놓았는데 안타깝게도 저는 1개 밖에 보지 못했네요. 그래서 박희곤 감독이 어떤 스타일인지 잘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땅'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고자 했던 감독의 생각이 적중했던 것일까요?  현재 과열된 ‘부동산 시장’에 대해서도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만약 100년 후에 ‘명당2’가 나와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100년 전이든 500년 전이든 삶의 터전이 누군가의 욕심으로 죽음의 터가 되고 다수의 불행의 대가가 소수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명당’에 집중하기 보다는 ‘인간의 욕망’에 초점을 뒀다. 그럼에도 어떠한 관점을 두고 보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ㅣ '명당'의 역사적 배경

-장동 김씨

영화 <명당>은 1800년 정조 사후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3대 60여 년간의 세도정치기가 절정에 달했던 헌종대(1834∼1849)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순조의 비는 안동 김조순의 딸(순원왕후)이었으며 이 결혼이 세도정치의 시작이 된다. 세도정치기의 안동 김씨는 장동 김씨라고도 부른다. 안동 김씨는 시조가 태어난 장소가 안동이라는 말이지 후손들이 계속 거기에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안동은 주류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세도정치기의 안동 김씨는 인조대 척화파의 선두주자 김상헌 이후 본격적으로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주로 창의문(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인근 장의동에 살아서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흥선대원군

김조순은 반남 박씨, 풍양 조씨 등과 권력을 나눠 가지며 주도권을 잡아나간 반면, 그의 아들 김좌근은 안동 김씨만의 권력을 독점적으로 구축했다. 안동 김씨 세력이 불편했던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의 빈으로 안동 김씨가 아닌 풍양 조씨를 선택했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중 요절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이후 아들인 헌종이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했고 자연스레 세자빈은 신정왕후가 되었다. 이 신정왕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옹위했다. 안동 김씨로 둘러싸인 궁궐에서 상대적으로 비주류 세력이었던 흥선군과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일 것이다.

흥선군은 젊은 시절 파락호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실제 그랬는지는 의문이다. 동양 군주제하에서 왕이 되지 못한 형제들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역모 사건이라도 발생하고 그들의 입에서 왕친인 아무개를 옹위하려 했다는 말만 나와도 그 아무개는 당연히 사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왕의 형제들(君)은 당연히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없다면 일반적인 왕친들의 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흥선군이나 아버지 남연군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지는 않았으며 야사에 나오듯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걸어갈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다만 철종이 후사가 없고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사전에 신정왕후와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분이 미천한 자와 사귀는 척하거나 돈을 빌리는 일탈적인 행동을 했다. 자신이 야심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무덤

조선시대 무덤은 능(陵), 원(園), 묘(墓)로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세자나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이다. 묘는 그 외 사람들의 무덤을 말한다. 총(塚)이라는 용어도 있다. 총은 주로 규모 등이 왕릉급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치 않은 무덤에 사용된다. 그래서 경주에는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가득하고 이 무덤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왕일 것으로 생각되어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을 대릉원이라 한다. 고구려 장군총도 어떤 학자들은 장수왕릉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왕에서 폐위되어 서민이 된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무덤은 묘이다. 드라마 <동이>로 유명한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무덤은 소령원이다.

그리고 이 도굴꾼들이 회곽까지 닿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풍수에서는 최소 6자 이상 파야 지기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왕릉의 경우는 10자를 팠다. 한 자가 30㎝ 정도이니 안릉의 깊이는 거의 3m에 달한다. 조선왕실은 엄격하게 왕릉만 10자를 팔 수 있도록 했다. 사대부나 일반인은 5자를 넘지 못했다. 이를 어기면 역모로 처벌했다. 오페르트 일당은 150∼180㎝ 정도 파 내려가야 겨우 회곽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풍수와 명당

-동기감응론

풍수는 땅을 고르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한 이론이다. 삶의 공간을 선택하는 것은 양택, 죽은 자리를 선택하는 것은 음택이다. 사람들의 생활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양택이지만 일반인들은 음택에 더 많은 관심이 있고 이 음택의 사상적 기반은 동기감응(同氣感應)론에서 시작한다. 사람이 죽은 후 남은 뼈가 다시 생기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좋은 곳에 장사를 지내면 후손이 복을 받고, 좋지 못한 곳에 모시면 화를 입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안동 김씨들이 무덤을 잘 써서 지금의 복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혹세무민하는 이런 발복풍수는 실학자들에 의해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 정약용은 "살아있는 부모님이 자식과 마주앉아 이야기해도 어긋나기 쉬운데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있는 자식들에게 복을 줄 수 있겠는가?"라 하였고, 홍대용은 "중형을 당한 죄수가 옥에 있을 때 겪는 고통이 견딜 수 없다 하여 옥 밖에 있는 그 죄수의 아들이 몸에 병이 생겼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서 하물며 죽은 부모가 살아있는 자식에게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느냐고 동기감응론을 일축했다.

<출처> 문화유산을 보는 눈

어제 성공적으로 마지막회를 반영했던 '미스터션샤인'도 역사적 사실을 잘못 표현해 이슈가 되었습니다. 영화는 소재를 가지고 각본을 하는 것이기에 타큐멘터리와 같이 객관적인 사실만을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게 되면 다른 작품보다 훨씬 더 다양한 것들을 살펴보고 점검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역사적 '팩트'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생각보다 적지도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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