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기 (월급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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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별수 있겠어요?”

‘임금 문제를 들여다보겠다’고 하니 직장인들은 입을 맞춘 듯 똑같이 반문했다. 평소 신경 쓰지 않는 월급 명세서를 어쩌다 곰곰이 들여다볼 때,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려달라며 파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 교도소에 갇힌 대기업 ‘오너’가 배당금 수백억원을 챙겼다거나 기업체 임원들이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월급쟁이들의 머릿속을 맴도는 자조 섞인 질문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월급에는 귀천이 있다. 2018년 한국 사회에서 일의 내용이나 힘든 정도, 노동시간보다 더 크게 월급을 좌우하는 것은 그 일터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좁은 문’을 거쳤나 하는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원칙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오른 이들에게는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얘기처럼 들린다. 명분만 놓고 보면 임금격차는 더 좋은 인재를 뽑아쓰려는 사용자와 더 좋은 일자리를 원하는 구직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노동시장의 경쟁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다.

하지만 정말로 ‘시장’이 우리의 월급을 결정할까. 근로형태나 일한 기간, 산업의 종류나 기업의 크기, 노조의 교섭력에 따라 일해서 받는 대가는 달라진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시험을 봤는지도 참작 사유가 된다. 성별이나 국적 심지어 혼인 여부까지, 사용자가 정한 방식에 따라 임금은 천차만별이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한국의 노동시장은 완전한 시장은커녕 ‘완전하게 불완전한’ 시장에 가깝다”라고 썼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급여는 그 기업이나 시장이 정하는 게 아니라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이 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을 해서 먹고사는 모든 이들에게 임금은 곧 삶이다. 생존 수단을 넘어선 개인의 자격증명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일하는 사람들은 정당한 대가, 살 만큼의 대가를 누리고 있을까.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과 최저임금 인상, 격차 줄이기를 말한다. 세계에서는 기본소득 실험과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월급 때문에 간호사들이 춤을 추고, 백화점 직원이 무릎을 꿇고, 경비원들이 ‘빵셔틀’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별수 있느냐’는 철벽같은 신화에 균열이 생기는 날이 올까. 임금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고도성장과 경제위기를 거치는 사이 소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격차’의 무엇이 얼마나 문제인지, 급여와 노동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들여다본다.

자영업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금을 받아 먹고산다. 월급은 노동의 대가이며 일하는 이들의 삶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월급은 삶이고 영혼이다. 월급 명세서에는 임금체계와 노동현실이 담겨 있다. 명세서에 적힌 숫자에는 노동을 바라보는 기업의 시각이, 한국 사회가 노동자에게 보장해주는 항목이, 정부와 공적 영역이 한 시민을 위해 어떤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 드러난다.

고용한 사람은 몇 푼이라도 인건비를 줄이려 하고, 일 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어한다. 돈을 주고받는 사이에서 권력은 비대칭적이다. 직장에 다니는 이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은 수당 하나하나 ‘영혼까지 끌어모은’ 영끌 연봉에 인생을 걸지만 정작 자기 월급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법적 의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월급 명세서를 노동자들에게 지급하지 않는 고용주들도 적지 않다.

■ ‘영끌 연봉’을 아시나요

“대부분 이직을 할 때 월급 명서세에 잡히지 않는 수당까지 ‘영끌 연봉’으로 계산한다.
최대한 많이 받은 것으로 해야 협상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연봉’의 축약어인 영끌 연봉은 취업준비생이나 사회 초년생 사이에 몇 년 전부터 퍼진 말이다. 기본급 외에 수당 항목이 많은 임금 체계에서 유래했다.

법에 명시된 수당은 연장근로수당, 야간·휴일근로수당, 연차미사용수당, 주휴수당, 휴업수당 정도다. 하지만 기업마다 자의적으로 책정하는 수당이 많다. 출납수당, 기술수당, 팀장·조장수당, 현장수당, 자격수당, 운전수당, 근속수당. 심지어 ‘김장수당’도 있다. 비과세 수당인 식대·육아수당·운전보조금 등도 추가된다.

기본급이 낮고 수당 항목이 많으면 노동자들은 일하는 시간을 늘리게 된다. ‘수당 체제’로 노동시간이 늘어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사용자들은 통상임금을 줄일 수 있으니 이 편이 좋다. 야간·휴일근로수당과 연장근로수당 등 법정 수당은 통상임금의 150%를 줘야 한다. 통상임금 액수가 늘어나면 법정 수당도 늘어나니, 기업들엔 부담이 커진다. 지난해 대법원이 상여금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했지만 아직은 일부 대기업에만 해당되는 일이다.

식대나 운전보조금처럼 비과세 수당을 늘려 사용자가 4대보험 부담을 줄이려 한다는 비판도 꾸준히 나온다. 4대보험과 국민연금 산출액이 기본급과 과세 수당을 기준으로 이뤄진다. 4대보험과 국민연금은 사용자와 노동자가 절반씩 부담한다. 비과세 수당이 늘어나면 기업이 직원의 4대보험과 국민연금에 보태야 하는 부담도 줄어든다. 노동법률사무소 ‘시선’의 김승현 노무사는 “기업이 합법적으로 국가 재원을 갉아먹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사라진 수당은 어디에

반대로, 월급을 줄이려고 수당을 한데 합치기도 한다. 중견기업 2년차 유진수씨(31·가명)의 월급 명세서는 단순하다. 기본급 238만5000원에 식대 12만원, 시간외수당 84만3000원이 전부다. 근로계약서에는 기본 하루 8시간 외에 추가 근무 2시간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2시간에 해당하는 시간외수당은 기본급의 150%로 지급된다고 적혀 있다. ‘포괄임금제’의 대표적인 예다.

유씨는 매주 두세 차례 밤 10시 넘어까지 일한다. 일이 몰릴 때는 밤샘근무도 해야 한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일한다 해서 더 나오는 수당은 없다. 근로계약보다 많이 일해도 포괄임금제라는 명목으로 연장근로수당을 주지 않는 기업들이 많다. 게임업계나 정보기술(IT)업계에선 특히 흔한 일이다. 포괄임금제를 적용한다 해도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시간보다 더 일했다면 연장근로수당이나 야간근로수당을 받아야 하지만 법은 멀고 ‘사장님’은 가깝다.

유씨가 다니는 회사는 올해 하반기부터 업무 지침을 바꾼다. 포괄임금제 적용이 끝나는 오후 8시 이후에 일을 하면 그만큼의 연차를 주기로 했다. 밤 10시까지 일하면 2시간의 연차가 발생한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되, 돈 대신 휴가를 주겠다는 것이다. 노동법을 전공한 최석환 명지대 교수는 “포괄임금제는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근로계약이 아니라 사용자와 계약자가 자의적으로 맺은 계약일 뿐이다. 사용자가 계약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구조이므로, 포괄임금제를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기도 오산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정성훈씨(29·가명)의 월급 명세서에 적힌 내역도 기본급 136만8500원과 ‘제수당’ 23만원2100원이 전부다. 회사에선 일한 시간을 매일 체크해 시간외수당을 준다고 하지만, 제수당으로 뭉뚱그려 나오니 제대로 돈을 받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포괄임금제를 도입하진 않았지만 수당 항목이 거의 없는 중소기업도 많다. 최저임금에 가까운 기본급과 최소한의 시간외수당만 주는 것이다.

■ 이주노동자의 ‘깜깜이 월급’

캄보디아에서 온 스룬 알리씨(28·가명)는 지난해 4월부터 충남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농장주가 내준 비닐하우스에서 먹고 잔다. 근로계약서에는 142만8800원을 받기로 돼 있는데 그가 받은 돈은 월 112만8800원에 불과했다. 월급 명세서를 따로 주지 않으니 30만원가량이 왜 공제된 것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30만원을 뺀 근거는 ‘이면 계약서’에 있었다. 농장주가 알리와 쓴 근로계약서 외에 ‘숙소비 30만원 공제’가 적힌 이면 계약서를 만들어 월급에서 떼어 간 것이다. 노동자의 월급은 전액 지급하고, 뒤에 비용을 돌려받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이런 원칙의 예외가 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2월 시행한 ‘외국인근로자 숙식 정보 제공 및 비용 징수 관련 업무지침’에서 고용주가 이주노동자에게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를 숙소로 제공하면 통상임금의 13%까지 사전공제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렇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142만8800원의 13%면 18만5700원인데, 고용주는 지침의 상한선보다 많은 30만원을 잘라내기 위해 이면계약서를 썼다. 이주노동자 쉼터 ‘지구인의정류장’의 김이찬 소장은 “예전에도 월급 명세서를 지급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임금 체불 등으로 문제를 제기할 때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아예 명세서를 주지 않는 사업주가 많다”고 말했다.

그나마 주는 명세서도 ‘모양을 갖춘’ 것은 드물다. 김 소장이 이주노동자들에게서 2015~2016년 받은 명세서를 보면 은행 현금봉투에 월급 액수를 쓰거나 사장이 카카오톡 메시지로 월급 내역을 알려준 것이 전부다. 심지어 기숙사비 20만원, 쌀값 2만원, 전기요금 2만6880원을 일방적으로 뗀 사업주도 있었다.

알바노동자에게도 월급 명세서는 남의 일이다. 알바노조에 상담을 요청해온 이들 10명 중 9명은 월급 명세서를 받지 못했다. 주 15시간 일하면 줘야 하는 주휴수당이나 사용자가 본인 사정으로 일찍 가게 문을 닫을 때 지급해야 하는 휴업수당을 떼어먹는 일은 다반사다. 그러나 월급 명세서가 없으면 이런 부당한 행위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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