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BURNING, 2018)

일상/영화리뷰|2018. 5. 27.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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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마인드입니다. 오늘은 칸에서 극찬받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 (BURNING, 2018)]을 관람했습니다. 관람하기전 지인들이 이야기 하기로 호불호가 갈리더군요. 대다수의 친구들이 중간에 나가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다른 지인은 생각해 볼 것들을 많이 제시하는 것 같아 괜찮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전에 어떤 기사, 정보 없이 제 개인적인 생각을 해보고자 용산 CGV를 찾았습니다.

그동안 용산역은 자주 이용했었는데 오랜만에 아이파크몰을 살펴보니 정말 엄청나게 변했더라구요. CGV로 많이 바뀌었구요. 개인적으로는 여의도 IFC몰에 있는 CGV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상점들도 많이 변화가 있어서 먹을것, 마실것 등 부족한게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복합문화 공간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새롭게 변신한 용산 CGV 옥션관에서 호불호가 명확한 [버닝 (BURNING, 2018)]을 관람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영화는 분명히 아닙니다. 대중들이 즐기는 영화는 명확한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버닝 (BURNING, 2018)]은 관객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속에서의 결론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생각하는 것과 작가의 의도가 같은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버닝' 오정미 작가 "메타포 몰라도 즐길 수 있어요"

"이 영화에는 한국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삶과 정서가 담겨있어요. 그런데 국내 스코어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목마름이 있네요."칸영화제 폐막 다음 날인 지난 20일(현지시간) 프랑스 니스 공항에서 만난 '버닝'의 오정미 작가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화려한 레드카펫과 수많은 외신 인터뷰, 영화제 소식지의 역대 최고 평점 등 낯설고 '비현실적인' 경험을 압축적으로 한 여운이 남은 듯했다.

"칸은 아주 낯설었어요. 보이는 근사함을 위한 시스템이 정착된 곳 같았죠. 매일 사진을 찍기 위해 일어나 플래시 불빛 앞에 서야 하는 느낌이랄까…마치 벤의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떠들썩한 칸과는 사뭇 달랐던 국내 반응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그는 "국내 평론의 반응과 스코어가 상대적으로 미미해서 멍하고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그렇다고 '버닝'의 화력이 벌써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인터넷 영화 커뮤니티에는 "영화를 볼 때는 몰랐는데 하루 이틀 뒤에 여운이 많이 남는다"는 반응이 많다. 영화 속 상징과 은유 등을 놓고 토론도 활발하다.

"이 작품은 2016년에 이 감독님의 '분노 프로젝트' 중 하나로 들어왔어요. 제가 2013년 감독님과 처음 일하기 시작할 때부터 감독님은 세상의 분노에 관심이 많으셨거든요. 저도 졸업작품으로 분노한 여자에 관한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만났을 때, 이 작품을 잘 확장하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 작가는 "'버닝'은 시작부터 보통의 한국 사람을 위한 영화였다"고 떠올렸다.

"시나리오 회의가 꽉 막힌 날에는 감독님과 사무실 앞 홍대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보곤 했어요.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힘이 났죠.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오면서 현실에 있는 공간을 찾았고, 연출·제작부가 취재에 합류한 뒤엔 더욱 다양한 보통 사람들을 만났어요. 새롭게 발견한 한국의 현실 속 공간과 보통 사람들이 시나리오 안으로 들어왔죠."

시나리오는 수많은 수정을 거쳐 이야기가 확장되고, 디테일이 살아났다. 캐릭터도 조금씩 바뀌었다.

"2016년 시나리오 속 종수는 지금보다도 더 말이 없는, 생각과 행동이 더 단순해 보이는 인물이었어요. 벤 역시 지금보다 더 이미지 그 자체였죠. 종수에게 좀 더 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벤에 대한 종수의 분노, 즉 청년의 분노가 더 분명하게 느껴졌죠. 그런데 간단한 정답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둘의 만남이 너무 사회적인 맥락, 즉 가난한 자와 잘 사는 자로만 읽힐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우리가 원하는 건 이 만남 자체에 대해 질문하는 거였는 데요. 그래서 좀 더 개인적인 만남, 진짜 같은 만남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파주 사는 청년이 반포 사는 형을 만난다. 그리고 어느 날 그 형을 죽인다. 이런 사건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처럼 구체적인 실감을 주려고 노력했어요."

극 중 해미(전종서 분)는 종수(유아인 )와 벤(스티븐 연), 두 남자를 잇는 인물이자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 중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이 쓰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라는 개념을 듣는다. 리틀 헝거는 육체적인 굶주림에 직면한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을 뜻한다. "원래는 제가 오랜 시절 품고 있었던 메모에서 우연히 가져왔던 말인데, 그게 마치 운명처럼 해미의 중심이 됐죠."

영화 속에서 해미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상의를 탈의한 채 춤을 춘다. 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던 종수는 끝내 한마디를 던진다. "창녀나 그렇게 하는 거야."

오 작가는 "그 대사에서 사실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촬영 때 그 대사를 빼자고 말하는 스태프가 많았는데 제가 관철했죠. 그런데 칸에서 영화를 보니 꼭 필요한 대사였다는 확신이 다시 들었어요. 그 대사는 인물에 대한 질문을 만들고, 이야기를 확장하는 역할을 하거든요. 상영이 끝난 날 뒤풀이에서 만난 한 이스라엘 배우가 제게 와서 그 대사가 너무 와 닿았다고 말해줬어요. 그때 이야기라는 것이 국경을 넘어 자유로운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죠."

그는 "제 글에는 평범한 여성으로서 욕망하거나, 욕망하길 두려워하는 것을 담는다"며 "그것이 영화의 본성, 예술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가끔은 제 단편영화 속 여성이 주체적이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아요. 그럴 때면 저는 착하고 모범적인 여성만을 그릴 생각은 없다고 답하죠."

"'버닝'은 굳이 메타포(은유)를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예요. 이 작품을 보고 어떤 이들은 벤을 연쇄살인자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이들은 계급의 문제를 단순하게 드러냈다고 보죠. 누군가는 청년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하고요.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흥미롭다고 봐요. 다만 자기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남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확장됐으면 좋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버닝 (BURNING, 2018)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표출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생각들을 표출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부족한 국내에서는 생각할 영화가 별로 와닿지 않을 수 있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영화를 통해 생각한 것은 "계급의 문제에 대한 청년의 분노"의 결과로 생각했거든요.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종수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공장에 갔다가 번호를 부르게 하고, 일방적으로 야근과 특근을 지시하는 감독관의 태도에 등돌린 장면 때문이였습니다.

버닝 (BURNING, 2018)이 해외에서 최고평점을 받았던 이유는 좀 더 폭넓은 생각의 틀을 관객에게 선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관객들이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생각과 토론의 문화가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에 호불로가 갈리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영화였습니다.

전문가의 의견으로 버닝 (BURNING, 2018)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종교성 표출 거부된 시대의 젊음, 이창동의 영화 <버닝>

◈초월의 열망: 온전한 존재, 온전한 삶을 향한 갈망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인생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를 고민해보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때론 무겁고, 때론 난해하며, 때론 서글프다. 마치 인간의 삶 자체가 그런 것이니 영화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비교적 염세적인 분위기가 그의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버닝> 역시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가 출신으로서 영화라는 대중적 미디어에 깊이를 담아내려는 그의 노력을 지켜보자면, 문학에 철학을 담아내려던 사상가들의 모습, 특히 사르트르나 카뮈 등 실존주의 문필가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무겁고 진중한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La Nausée, 1938)>나 카뮈의 소설 <이방인(L'Étranger)>과 닮아 있다. 

사르트르나 카뮈의 소설 속에서 대중성을 기대하기란 무리다. 일반적인 입장으로 볼 때 참으로 허무하고 난해하다. 그렇지만 그 허무함의 난관을 고통스레 감내하고 작품을 다 읽어낸 이들에게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진중한 물음을 곱씹을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 명작으로 평가된다.

<버닝> 역시 그런 관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영화를 볼 때보다 보고 나서 더 생각에 남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작품들 속에는 항시 인간의 삶 깊은 층위로부터 유발되는 '종교적' 갈등이 관여된다. 사르트르나 카뮈는 무신론자였다. 이창동 감독 역시 그 작품 세계를 보면 무신론적 입장을 고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 속에는 인간의 종교성의 문제가 어김없이 다뤄지고 있다.

▲해미가 사는 집에서 본 풍경. 남산타워가 한눈에 보이는 용산구의 한 허름한 주택. 비루한 삶 가운데 어떤 고결하고 높은 것을 바라보는 해미의 심정을 표현한다.
 
여기서 인간의 종교성이라 할 때는 외견상 어떤 특정한 신앙의 형태를 드러내 보이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종교학자들은 특정한 교의나 신앙의 형태, 혹은 종교 전통 이전에 인간이 본원적으로 갖고 있는 초월에 대한 의식과 갈망을 지목해 종교성이라 명명한다.

이들의 관점으로 보면, 종교성이란 인간이 삶의 난관과 고난을 겪으면서 갖게 되는 온전함과 완전성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무지, 질병, 고난, 죄악,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죽음까지 인간의 삶에 결부된 숱한 부정적 요소들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초월을 지향하는 인간의 근원적 종교성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종교학자들의 해명이다.

<버닝>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종수(유아인 분), 벤(스티븐 연 분), 해미(전종서 분) 이 세 사람이다. 이 셋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을 옭아매는 삶의 굴레로부터 초월을 시도한다. 셋 모두 초월을 바라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다르게 규정된다. 그리고 그 다름으로부터 유발되는 갈등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한 사람만 허무하게 살아남는 파국을 초래한다.

<버닝>의 파국적 결말을 보면서, 인간의 종교적 열망에 대해 이창동 감독이 갖는 애증과 같은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전편에서 언급했듯 난해한 듯 치장되어 있으나, 사실 명료하고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버닝>은 인간의 초월 욕망이 얼마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종교적 열망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는지도 확인시켜 준다.

삶에 운명처럼 깃들어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이런 근원적인 열망을 어떻게 통제할 수 없어 고민하고, 마음 아파하고 결국 살인까지 이르는 오늘날 젊은 청년들의 모습, 감독은 이를 보여주려 하는 듯 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굴레 안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고결한 존재적 가능성, 그렇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항상 자리잡아 마치 희망고문과 같이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 온전함과 자기-초월의 가능성 앞에서, <버닝>의 세 주인공은 기뻐하는 동시에 좌절한다.

◈초월의 몸짓: 원시부족의 자기-초월 제의로서 춤과 사냥

해미는 작중 자기-초월 열망을 가장 '종교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이다. 나레이터 모델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카드 빚에 쫓겨 사는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리틀 헝거(경제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그레이트 헝거(삶의 참된 목적과 가치의 결여)를 끌어안고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전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여행을 결심한 이유도, 바로 이런 삶의 목적 및 의미의 부재 때문이다.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기대했던 바는 바로 원시부족적 삶의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Bushman)을 만나는 것이다. 해미가 종수에게 설명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라는 개념 역시 그들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해미는 작중 실제 아프리카로 가서 부시맨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제의 형식인 몰아지경 상태에서 추는 춤(trance dance)을 배워온다.

통상 서구에 부시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산(San)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가운데 하나로, 대대로 아프리카 남부에서 거주해 오다 아프리카의 반투(Bantu)족, 츠와나(Tswana)족, 남아공 백인 이주민 등에 의해 척박한 사막으로 쫓겨나 살고 있다. 이들은 외부의 침입자가 몰려올 때 저항보다는 타협과 순응을 선택했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 결과 빈곤과 질병에 취약한 사막의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보츠와나의 중앙 칼라하리 사막에 거주해 왔는데, 근래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막에 대량의 다이아몬드가 매장된 사실이 알려지며 사막에서조차 터전을 잃고 대다수가 기아와 탈수로 고통받거나 난민캠프로 쫓겨나 살고 있다. 일부는 관광객들에게 원시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대가를 받는 재연 배우로 살고 있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극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라 볼 수 있다. 물리적으로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을 뿐 아니라, 외부의 모든 이들로부터 이물질 취급을 당해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거주하는 원시부족 부시맨의 제의인 춤.
 
해미는 이런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원시부족적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부시맨들이야말로, 참된 고난 속에서 그들만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자기-초월의 모범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그들이 초월 경험을 위해 채택한 방법, 즉 춤을 배워온다. 해미가 배운 춤은 산족 고유의 샤머니즘 종교 제의로서, 주로 병든 이의 치료를 위해 부시맨 원주민 주술사들이 추던 춤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해미는 친구인 종수, 그리고 아프리카에 만난 낯선 남자 벤 앞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그녀가 배운 이 초월의 몸짓을 선보인다. 마치 조금은 자기 삶이 온전해진 것 같지 않냐며 자랑하려는 듯. 그러나 이 춤에 대한 종수와 벤의 반응은 뒤틀려 있다. 종수는 해미에 대한 일종의 소유욕 때문에, 벤은 해미의 초월을 번제물 삼아 자기-초월을 이루려는 욕망 때문에 해미의 초월을 향한 몸짓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은 산족 종교로부터 춤이라는 제의와 함께 사냥이라는 생존 방식을 영화의 모티프로 삼는다. 산족 종교는 사냥한 동물 가운데 특별히 영양(eland)의 기름을 신의 생명이 담긴 것으로 여겨 제의에 활용한다. 특히 장례식 때 이 영양 기름을 사용한다. 이 사냥과 장례 모티프는 벤에 의한 해미의 죽음, 그리고 종수에 의한 벤의 죽음에 반영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벤은 부족할 것 없는 삶이 주는 무료함에 지쳐 자신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여성들을 사냥하듯 했고, 종수는 벤이 해미를 사냥한 데 격분해 벤을 사냥한다. 벤은 재미로 일삼는 사냥을 자기 삶의 굴레를 분쇄하는 초월의 제의로 삼고, 종수는 자신에게 그레이트 헝거를 일깨워준 소중한 친구이자 연인을 사냥한 자를 사냥함으로써 자기의 지긋지긋하고 비루한 인생으로부터 초월을 시도한다.

원래 종수는 해미가 겪고 있는 그레이트 헝거를 봉인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삶의 의미 및 온전한 가치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종수의 삶은 망가져 있었다.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하지 못하는 역기능적인 가정, 대학에서 배운 바(문예창작과 출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택배 배달원으로 거의 날품팔이처럼 살아가는 처지에서, 삶의 고결함과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분노만을 유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종수에게 분노가 아닌 삶에 대한 애정으로 자기-초월을 시도할 수 있게 도와준 이가 해미다. 그리고 그런 해미를 파괴한 이는 벤이다. 종수는 보다 온전한 방식으로 자기 종교성을 표현할 기회였던 해미의 삶을 박탈해 버린 벤을 사냥함으로써, 결국 원래 종수의 삶에서 나올 수밖에 없을 법한 분노와 자기파괴의 초월을 감행한다.

결국 감독이 <버닝>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 인간의 원초적 종교성이 삶에 희망과 생명력을 선사하는 동시에 파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이런 종교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다뤄야 할지 가르쳐줄 힘을 상실했다는 점 역시 지적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이런 태도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을 통해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다. <박하사탕>의 홍자(김여진 분), <밀양>의 신애(전도연 분), 그리고 <버닝>의 해미를 통해 유형화된, 종교에 대한 이런 비관적이면서 비판적인 메시지는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심층적 비판의식을 반영한다.
 
<버닝>의 세 주인공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초월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종국은 허무한 파국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종교성을 보다 온전하게 감내할 방법은 없을까? <버닝>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이 기독교계를 비롯한 종교계에서 진정 고민해야 할 바임을 훈수하는 듯 하다. 교세 확장과 이권 다툼 외에 제대로 한 일이 무어냐는 우회적 비판이기도 하다. 획일적 교의에만 천착해 삶의 현장에서 겪는 고민과 절망과 분노를 외면하는 경직된 제도화에 대한 질타이기도 하다.

물론 <버닝>에서 볼 수 있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초월을 향한 '종교적' 방황이 순전히 기독교를 비롯한 기타 기성종교의 무능 탓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실존철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종교의 다원성, 가치의 다원성을 부르짖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한' 세태 역시 한몫하고 있다.

<버닝>은 어떤 가치를 찾아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근원적 종교성을 일깨우고 표출해야 할지, 적절한 해답은 주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진보적 정치색이 깃든, 이창동 감독 특유의 염세적으로 고착된 인간이해 때문인지, 오직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만 진정으로 개별화된 자기 인생을 살게 되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다. 이로 인해 그가 우리 사회 전반과 종교계에 던지는 물음 가운데는 상당한 수준의 편향적 태도가 엿보인다.

그렇지만 적어도 삶의 참된 가치를 초월에서 찾으려 하는 근원적 종교성에 대한 고찰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어디에서 자기를 초월하는 희망을 찾는가?" 이 물음은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고민해봐야 할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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