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의 용기 그리고 변명 뒤에 숨은 남자들

일상/다양한이야기|2018. 5. 25.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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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의 용기 그리고 변명 뒤에 숨은 남자들

ㆍ폭력·혐오 일삼는 BJ에게 “잘못이다” 말 않는 남자들의 비겁함

여성 연예인인 수지는 성폭력 피해자를 옹호하는 상식적인 발언을 하고도 비판받았다.
  
용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다. 지난 17일 가수 수지는 촬영을 빙자한 스튜디오 안에서의 성추행을 고발한 유튜버 양예원을 응원하며, 가해자에 대한 처벌 청원에 동참했다는 것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밝혔다(다만 해당 청원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스튜디오는 현재 가해 사실과 전혀 무관한 이들이 인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해당 사건의 수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되 그럼에도 “그 ‘여자사람’에게만큼은, 그 용기 있는 고백에라도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며 “저렇게 지나가게는 두고 싶지 않았다”고 자신이 동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설명했다. 이후 해당 스튜디오의 무죄가 밝혀질 경우 수지를 처벌해달라거나 심지어 사형을 요청하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다는 것을 결과론일 뿐이라 차치하더라도, 수지의 행동이 굉장한 용기를 동반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여성 아이돌이 ‘Girls can do anything’이라고 적힌 휴대전화 케이스 사진을 SNS에 올리거나 5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힌 것만으로 온갖 사이버 불링이 쏟아지는 사회에서, 역시 여성 연예인인 수지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여성 피해자의 입장을 옹호하고 가해자의 처벌에 힘을 보태는 건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야만 가능한 것이다.(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힌 것으로 질타를 받아야 하는가? 정녕 이 사회는 공감과 대화가 단절된 사회인가?)

데이트 폭력 행사·성적 희화화
여성 혐오 내세운 인터넷 방송
최근 남자 아이돌들 시청 논란

수지의 용기에 대해, 또한 그의 게시물에 동의의 표시를 한 여성 연예인들의 용기에 대해 상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글은 용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대신 어떤 남성들의 비겁함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최근 틴탑의 니엘, 하이라이트의 윤두준, FT아일랜드의 이홍기는 인터넷 BJ인 보겸과 철구의 방송을 시청했다는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보겸은 데이트폭력 가해자로 알려져 있으며, 철구는 여성혐오부터 광주항쟁 비하, 기초수급자 비하 등 일베가 사람이 된 듯한 BJ.

물론 해명이 뒤따랐다. 지난해 보겸의 방송에서 친분을 과시했던 니엘은 “앨범 프로모션차 방송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는 정도로 선을 그었고, 윤두준 역시 “<원피스>에 대한 분석 글과 <오버워치>를 좋아하다 관련 영상을 몇 번 본 게 전부”라고 해명했다. 철구의 방송을 보고 별풍선(해당 플랫폼의 사이버머니)까지 쏜 것으로 알려진 이홍기는 “니들이 지금 ‘극혐’하는 그런 짓을 할 때 본 거 아니”라고, 훨씬 짜증스럽지만 역시 선을 그었다. 철구가 방송에서 숨 쉬듯 혐오 표현을 쓰고,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보겸 역시 <원피스> 관련 방송 중 여성 캐릭터를 성적으로 희화화하곤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남자 아이돌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하지만 콘텐츠 중 혐오표현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정서 자체를 콘텐츠로 구현한 철구 방송을 보면서도 “그런 짓을 할 때 본 거 아니”라는 이홍기의 말을 진실로 믿어주더라도, 여기엔 해당 BJ들에 대한 도덕적 입장이 놀라울 정도로 생략돼 있다.

BJ나 방송에 도덕적 입장 없이
인기 BJ·팬덤과 척지지 않을
‘안전 거리’ 유지한 채 해명 일관

팬들의 우려에 대해 감히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며 억울함만 내세우는 이홍기의 대응은 철구의 폭력성과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이미 무책임하다. 게다가 “니들이 ‘극혐’하는 거”를 보지 않았다고 강조할 뿐, 본인 역시 철구의 그런 발언들을 ‘극혐’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어딘가 이상하다. 니엘도 윤두준을 끌어들인 것에 대해서만 사과할 뿐 보겸의 데이트폭력 문제와 콘텐츠의 성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나마 윤두준은 “어떤 점에 대해 염려하시는지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더 신중히 행동하겠다”고 어느 정도 반성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점에서 이홍기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지만, 보겸의 콘텐츠에 대한 윤리적 입장은 최대한 자제한다. 즉 그들 해명의 진정성을 100%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해당 BJ들을 구독하고 좋아하는 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고 그렇기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도, 보겸과 철구의 말과 행동은 잘못되었고 자신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끝끝내 유보하는 셈이다. 이건 비겁하다. 그들은 더 나아가지 못한 게 아니라, 안전한 거리를 잰 것이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되 인기 BJ와 그들의 팬덤과 척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 모든 책임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는 거리. 물론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 앞에서 비겁해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안전한 거리가 남성 연예인에게만 꾸준하게 허용되어 온 권력에 가깝다는 것이다. 여성 연예인은 여성이 인간이라는 것에 동의만 해도 ‘남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지만, 남성 연예인은 비윤리적인 콘텐츠에 대한 동의처럼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하고도 자신은 몰랐다고만 하면 끝난다.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들에게만 허용된 안온한 자리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수지 행동에 박수를 보내지만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지지가 용기를 내야하는 사회는 비정상

앞서 수지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대조는 단순히 빛나는 용기 앞에서 초라한 비겁을 더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거의 모든 도덕적 개선은 수지처럼 용기 있는 개인들의 행동에 상당 부분 빚지지만, 시민들에게 도덕적으로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초월적인 용기가 아니라 옳은 발언을 할 때 너무 큰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함께 구성해 가는 것이다. 공적 연대란 힘의 집중이기도 하지만 부담의 분산이기도 하다. 니엘과 윤두준, 특히 이홍기의 비겁함을 수지의 용기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이 지점이다.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만큼의 권력을 지닌 이들이 불의에 대해 침묵할수록, 불의의 피해자인 사회적 약자의 발언엔 더 많은 용기와 부담이 요구된다. (미치도록 맞는 말이다. 제발 권력이 있다는 사람들 그리고 세력들에 대해서 침묵하지 좀 말자. 계속해서 침묵하면 할 수록 요기와 부담은 복리처럼 늘어나서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겠다. 여성혐오적 발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BJ들의 방송을 보고 그에 대해 해명하면서도 끝끝내 그들의 폭력적 말과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발언하진 않는 남자들의 비겁한 침묵 때문에,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연대를 밝히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여성들이 굳이 용기까지 내야 하는 것이다.

남자 연예인들과 남자 정치인들 미투운동 등에 놀랄 정도로 침묵
비정상 사회를 공고히 하는 건 이런 남자들의 무책임함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수지의 용기엔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지만, 이 정도의 상식적인 발언에 비난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야 하는 사회는 이미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사회에서의 용기를 칭송하기보다는 비정상적인 사회를 공고히 하는 요소를 경멸하고 개선해야 한다. (비정상적인 사회를 공고히 하는 요소를 경멸하고 개선하려면 생각이 깨어있어야 한다. 그생각이 깨어 있으려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관심을 통해 의견을 제시하기위해선 학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자 과연 이와 관련된 대화로 토론이나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내 경험상으론 거의 없다. 이러니 비정상적인 사회가 공고히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난 기만을 부리지 않기 위해 블로그에 나의 생각을 표현한다. 이 조차도 매우 부족한 개선책이지만 말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남성들의 비겁함이다. 지난해 가구회사 한샘의 직장 내 성폭력을 다룬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말미엔 유재석을 비롯한 남자 연예인들과 정치인이 성폭력 피해에 대해 침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이후 각계각층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과 성폭력 피해 사실 앞에서 그들 중 다수는 놀라울 정도로 침묵했다. 그나마 나서서 다짐이라도 했으니 안 한 남성들보단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선의와는 상관없이 공적 연대에 대한 신뢰를 깨뜨렸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안전한 거리에서만 유지되는 남자들의 선의와 다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경험적 사실 앞에서 여성들에겐 생존과 실존을 위한 더 많은 용기가 요구된다. 누군가 더 많은 용기를 내야 하는 것 자체가 불평등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용기에 대한 감탄은 또 다른 기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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