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분노해야 하는가 (장하성)
매주 화요일에는 일주일동안 본 도서와 관련해서 리뷰를 쓰려고 합니다. 매주 1권의 책을 읽는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책 주제에 따라 쉽게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서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계획해 놓은 일정에 맞추어 도서를 리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주에 읽은 책은 <왜 분노해야 하는가> 입니다. 장하성은 現 대통령비서실장이죠. 2015년에 책을 쓰고 다양한 시건으로 현재의 대한민국을 진단했었는데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그동안 생각해왔던 실질적인 정책들을 꽤 빠르게 실행 적용하게 되었네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추후에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몇년전까지만 해도 "분노"에 대한 감정이 별로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화"가 많았죠. 이말은 세상에 대한 비판이나 분노보다는 제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무능력"에 화를 냈고, 제 자신을 매번 학대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외부에서 원인을 찾으려하기 보다는 내부에서 즉, 저 자신의 문제로 생각해왔습니다. 헌데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저런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보고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보니 궁극적인 잘못은 저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간단히 해 볼까요? 저는 평범하게 초중고를 졸업하고 집안 사정상 내려가게 된 광주라는 곳에서 대학을 나왔습니다. 지방대인거죠. 취업을 앞두고 아무런 생각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HRD라는 학문을 알게 되었고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다양한 루트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지방대를 졸업하고 변변한 "스펙"도 없는 제가 기업 HRD부서에 바로 들어가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것과 같이 힘들었습니다. 이에 도피 및 기회 탐색 차원에서 서울에 있는 HRD 대학원에 진학을 했습니다. 당시에도 연 1천만원 정도 되는 등록금과 서울에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새벽에 신문배달 부터 다양한 알바를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학교 다니고, 먹고, 자는 정도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대학원을 졸업하기 1년 전부터는 계약직이긴 하지만 학교를 다니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공공기관에서 일을 할 수 있어서 금전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 제 수중의 돈은 빚이 없는 "제로"의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나이가 28살입니다. 대학원을 졸업했으니 이제 제가 꿈꿔왔던 HRD라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했습니다. 자기소개서 부터 면접까지 기회가 있을때마다 지원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약 6개월 정도를 보낸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저는 "제 탓"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무능력해서 그렇다고, 내가 이뤄놓은게 없어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아마 이때가 제일 "저 자신의 학대"가 심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계속되는 "광탈"로 인해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때 쯤 작지만 나름 이름이 있는 HRD 컨설팅 업체에서 연락이 왔고 다행스럽게 취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름이 있다고 해도 영세한 업체라 급여가 밀리기도 하고 연봉이라고 해도 3천만원도 되지 않아 서울에서 거주 및 생활을 하면서 저축을 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곡차곡 적금을 넣으면 조금씩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 한다고 해놓고 또 길어졌네요. 스토리는 더 길지만 오늘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은 제 과거의 생활을 통해 지금은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요한 내용이 제 삶속에도 그대로 녹아져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 생활과 책내용이 유사한가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저축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 했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눈앞에 둔 고도의 경제성장 이면에 외환 위기와 금융 위기를 거치며 ‘원천적’ 분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해진 나라가 됐다. 기존의 연구들이 재산 불평등과 소득 불평등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은 그 둘을 분리하여 불평등의 원인을 규명했다. 저자는 재산 불평등이 빠른 시간 내에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한국 불평등의 주원인은 아직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축적의 역사가 짧고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원천적 분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소득 불평등이 모든 불평등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계는 노동소득, 즉 임금으로 생활하는데 한국의 임금과 고용(일자리)은 매우 불평등하고 불안정하다. 경제 3주체 중 하나인 기업도 역시 재벌이라는 초대기업과 대기업, 중소기업 간 임금격차와 거래 불평등이 심하다. 결국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 즉 ‘재분배 정책’으로는 불평등이 해결되지 못한다.
한국도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재산 불평등이 급속도로 되었다. 하지만 200년 이상의 자본축적의 역사가 있는 선진국과 달리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한국은 축적된 재산이또 다른 재산소득을 발생할 수준이 안 된다. 결국 불평등의 주원인은 소득 불평등에 있다는 얘기다. 한국 불평등의 주원인은 재산이 아닌 소득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대부분의 가계소득은 노동소득, 즉 임금이다. 임금격차로 인해 소득 불평등이 발생한 것이다. 중소기업의 평균 연봉은 3000만원이 안 된다. 그러나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2배, 초대기업은 3배가 넘는다.
1980년대 중반까지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는 10% 미만이었고, 외환위기 이전까지 1990년대에도 20% 내외였다. 이러한 임금격차는 고용격차 때문에 더욱 악화되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는 노동자 10명 중에서 4명이 대기업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절대 다수인 8명이 대기업의 절반의 임금을 받고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또한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절반을 받고 있고, 비정규직에서는 다수의 기간제가 시간제로 대체되면서 임금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 불평등은 재산이 아닌 소득 불평등으로 인해 악화된 것으로 그 원인과 과정이 선진국들과는 크게 다르다. 이 말의 의미는 아직 불평등을 교정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서는 제가 경험했던 중소기업의 연봉과 대기업의 연봉을 비교하면서 임금격차로 인해 소득 불평등이 발생되었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마 그 당시 이 책을 보았다면 잘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엄청난 불평등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중소기업에 다녔다면 저는 대한민국에서 소득불평등을 받는 10명 중 8명안에 속해있었을 겁니다.
저는 무조건 순응하고 불평하지 않고 그저 "제 탓만" 해왔습니다.
강요된 틀에 무조건 순응하지 말고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한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그리거 그 모순된 현실이 노력 부족과 같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면,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방법도 없다면 분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알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절망할 필요도, 아플 이유도, 힐링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긍정하고 자기개발에 열중하면 된다. 분노는 정의롭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바꾸는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점이다. 모든 행동은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대가 겪고 있는 아픔을 적어도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청년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못한 세대가 되었고, 그것은 기성세대의 탓이다. 청년세대 역시 기성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반복한다면, 그래서 이를 다시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 10년전 "88만원 세대"였던 30대는 "3포 세대"로 추락했고, 다시 "5포 세대"로 진화하고 있다. 20대는 쓸모없는 나머지라는 '잉여 세대'라고 자조하고, 너무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청년세대가 이런 퇴보와 퇴행과 비정상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함께 분노해야 한다. 불평등한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까지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불평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다수의 국민들이 함께 분노하고, 기성세대가 세상을 바꾸려는 청년세대에세 응원을 보낸다면 한국은 정의로운 사회라는 또 한번의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가?
재벌들은 단순히 시장 지배력과 경제적 힘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 사회, 언론, 문화, 교육 등 한국 사회 모든 영역과 관료, 법조계, 학계까지도 한국 사회의 인적 네트워크들이 모두 재벌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성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세대들까지도 재벌 체제에 대항하는 것을 "자살행위"로 받아들인다. 국민은 "재벌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강박적 불안감을 가지고 있고, 일부 진보 세력마저도 "재벌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영권을 세습하는 반시장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재벌들의 행태마저도 애국으로 정당화되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큼 어쩌면 한국 사회는 재벌의 총체적 지배에 "분노하지 않는 노예상태"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권력은 유한해도 재벌의 경제권력은 영원한 것이 되어버렸다. 한국 사회는 루소가 말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분리"되는 첫 번째 시기를 이미 지났고, "강자와 약자의 상태가 용인"되는 두 번째 시기를 넘어, "주인과 노예의 상태가 용인"되는 세번째 시기에까지 이르렀다.
경제가 성장해도 임금으로 삶을 꾸리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성장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고, 재벌 대기업과 소수의 고소득층만이 풍요를 누리는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의 재분배와 복지 실패 이전에 재벌 대기업에 대한 분배의 실패에 있다.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가난한 자가 이러한 정의롭지 못한 분배를 시장경제의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미 가진 자의 부와 권력에 예속되고 복종하는 노예이다. 불평등한 경쟁과 불평등한 분배를 시장에 맡기고 방치해버리면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목적 자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불평등한 분배를 바로잡을 수 있는 수많은 정책들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한국사회에 없는 것은 정책과 수단이 아니라 그러한 정책을 실천하려는 정치와 의지이다. 더 정확하게는 정치권에 그러한 정책을 실시하라는 국민의 절실한 요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미래가 암울하다.
"정의는 소수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빼앗아서 다른 사람들이 보다 많이 얻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고, 다수가 보다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무리 효율적으로 성장하는 체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개혁되어야 하며, 국민이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세상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안보고 원하는 세상만 보는 것"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서도 바꾸지 않게 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어진 것들을 의심하고, 이것이 아닐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것들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바꾸는 일의 시작이 된다.
아마 회사에 있는 제 후배들이 이 리뷰를 본다면 "귀에 못이 박히게 이야기 했던 내용이 바로 이책의 내용이네요"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불평을 하라고 후배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비판적이 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현실을 제대로 보고 의심을 해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월급을 받는게 당연한 것인지, 출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회사에서 무리한 요구와 불합리한 채찍을 가할때 무조건 따르는게 맞는 것인지 등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길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월급을 주면 주는대로, 출근시간은 지키지만 퇴근시간은 지키지 못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회사 고위간부의 경조사를 직원들이 챙기는 것을 당연하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변해야 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불행한 것들에 대한 과감한 "분노질"을 계속해서 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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