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
안녕하세요. 오늘은 봄이 온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매서운 바람과 추위가 공존하는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밖에서 하루종일을 보냈는데 워낙 날이 쌀쌀하다보니 머리가 다 띵하고 목도 간질간질 한 것 보니 감기가 올 것 같습니다. 모두 건강유의 하세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저번주에 봤는데 점점 블로그에 집중하는 제 자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무조건 그날에 있었던 일과 계획했던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요즘 회사일이 너무 바빠져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또한 변명이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확실히 집중도가 떨어진 것 같아 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될 것 같습니다. 자 지금 부터는 영화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감독입니다. ET, 쥬라기공원과 같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주는 감독이기 때문에 믿고 보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자주 영화를 만들지 않아서 궁금하던 찰나에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SF 영화를 개봉해서 제가 좋아하는 조조영화로 관람을 했습니다.
영화 레디플레이어 원 줄거리
2045년, 암울한 현실과 달리 가상현실 오아시스(OASIS)에서는
누구든 원하는 캐릭터로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고 상상하는 모든 게 가능하다.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역시 유일한 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를 보내는 오아시스에 접속하는 것이다.
어느 날 오아시스의 창시자인 괴짜 천재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는 자신이 가상현실 속에 숨겨둔
3개의 미션에서 우승하는 사람에게 오아시스의 소유권과 막대한 유산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그가 사랑했던 80년대 대중문화 속에 힌트가 있음을 알린다.
제임스 할리데이를 선망했던 소년 ‘웨이드 와츠’가 첫 번째 수수께끼를 푸는 데 성공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현실에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IOI’라는 거대 기업이 뛰어든다.
모두의 꿈과 희망이 되는 오아시스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
간단히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현실의 암울함을 회피하고자 할리데이라는 천재 게임개발자가 만든 오아시스라는 가상현실공간에서 엄청난 보물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가상현실방법 등은 새롭다기 보다 어디서 많이 보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무슨 영화인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전문가가 본 레디 플레이어 원 내용 中
한 화면에서 날뛰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루스 그리고 그 날뛰는 괴수들의 지면 아래로 차를 몰아 질주하는 주인공, 그 장면에서 왜 스티븐 스필버그가 80년대에도 그리고 여전히 21세기에도 명장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가 여전히 그리고 늘 명장인 이유는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느냐라는 데 선구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시간적 배경은 2045년 디스토피아이다. 발전한 과학 기술은 인간에게 가상현실의 오아시스를 제공하지만 그 오아시스를 벗어던진 현실은 기술의 독과점 기업과 그에 모든 것을 빼앗긴 빈민층들뿐이다. 기술과 자본에 주도권을 넘긴 세상에 대한 스필버그 식의 담론이다. 위태로운 그들의 컨테이너 탑을 벗어날 희망은 오아시스에 접속하는 것뿐인 암울한 미래이다. 마치 피시방 스크린과 핸드폰의 액정 불빛에 위로받는 이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암울한 미래를 지배하는 기술은 천재 과학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분)의 가상현실 시스템.
어느 틈에 블록버스터라 하면 이젠 dc와 마블이 아니고서는 발붙이기 힘들어진 시대, 코믹스의 영웅이, 그들의 이합집산이 어떻게 구현되는가가 블록버스터의 성공 여부가 된 세상에서 웬만한 블록버스터 판타지는 명함도 내밀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바로 그 독점된 블록버스터 판타지의 세계에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 건 바로 죠스를 통해 영화 산업에 최초 흥행 1억 달러 돌파 블록버스터란 장르를 처음 연 스필버그 자신이다.
그저 흔해빠진 여름철 납량특집용 상어 영화를 보이지 않는 추적자를 통해 자아내는 서스펜스를 통해 새로운 장르로 업그레이드 한 스필버그의 방식은 <미지와의 조우(1977)>의 결정판 <ET(1982)>, <인디애나 존스>시리즈, <쥐라기 공원(1993)>, <AI(2001)>까지 언제나 대중의 허를 찔렀다. 상어도, 모험가도, 공룡도, 인공 지능도 스필버그가 만들어 낸 건 아니지만 스필버그의 손을 거치면 전혀 새로운 경지의 캐릭터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그랬던 그가 코믹스의 영웅들이 득세하는 블록버스터 시장에 들고 나온 건 뜻밖에도 '응답하라 1980년대'였다. 2045년 빈익빈 부익부의 기술 디스토피아를 벗어나기 위해 가상현실 오아시스에서 사람들이 조우한 것이 스필버그란 이름을 세상에 가장 빛나게 했던 80년대의 복고라는 방식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어찌 보면 그 화려한 시절을 살아온 스필버그에겐 사필귀정 같은 선택이다 싶다.
그렇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마치 어르신이 후손들에게 내가 한창 잘 나가던 그때가 좋았었지 하는 후일담의 재기발랄한 버전 같다.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오아시스 보물 찾기에 뛰어든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분)는 그가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신화가 된 과학자의 삶을 복기한다. 전설이 되어 신봉되는 그의 삶을, 하지만 천재라는 신화를 걷어내면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한 평생을 보낸 괴짜 소년과도 같은 한 시대를 살아낸 이의 삶의 방식을 열쇠 찾기를 통해 반추하는 것이다.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란 천재가 자신의 삶을 후대에게 전해주듯.
기존에 제시된 길을 거꾸로 가보고 주저했던 그 순간에 다시 도전해보고 그리고 결과가 아니라 마치 <응답하라>가 그 처음을 피시 통신에 접속하던 시절에서부터 시리즈의 서막을 열듯 가장 결정적인 열쇠를 괴짜 과학자가 처음 매료되었던 게임을 통해 제시하는 그 방식은 열쇠를 찾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킹콩과 티라노사우루스의 캐릭터들, 듀란듀란의 음악, 스티븐 킹의 소설과 그 소설을 영상으로 구현한 스탠리 큐브릭의 서스펜스적 방식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시대에 여전히 던지는 명장의 교훈이 된다.
하지만 과거를 길어 새로운 블록버스터의 길을 열어내 보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가 된다. 그 이유는 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를 통해 제시한 콘텐츠의 구현이 바로 우리 시대 문화적 담론으로 제시되는 '융합'과 '에디톨로지'의 방법론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그의 책 <에디톨로지>에서 '창조는 편집(에디톨로지EDITOLOGY)이다'라 주장한다. 즉 하늘 아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신의 영역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조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김정운 교수의 주장은 일찍이 에드워드 윌슨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최재천 교수를 통해 대두된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통섭(CONSILIENCE)와도 맥락이 닿는다.
각각이 한 영화, 한 문화적 콘텐츠의 원형이었던 주인공들이 해체되고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된다. 어쩐지 가상현실 레이스 속에서 거칠게 날뛰는 킹콩이 반갑기까지 할 정도로 고전이 되어버린 <샤이닝>이 활개를 치는 공간은 무섭기보다 경이롭다. <토요일 밤의 열기>와 듀란듀란의 음악들은 정겹다.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을 위무하는 과거의 콘텐츠들이라니. 마치 지난 몇 년 우리 사회를 휩쓴 <응답하라>의 열풍처럼.
마블과 디시 코믹스가 범람하는 세상을 보며 즉 첨단 과학의 산물과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 뒤엉켜 현대 세계의 영웅으로 대두된 콘텐츠들을 보며 스필버그는 그렇다면 나도 내가 살아온 혹은 내가 작업했던 시대들을 '에디톨로지' 혹은 '통섭'해볼까라고 생각했을까? 이미 그 자신이 한 세대 이상의 문화를 창조해 온 주도자로써 바로 그 자신이 만들어 낸 혹은 그 자신이 활동했던 그 시대의 주인공들을 불러 모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란 도발적 아이디어를 유추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건 그가 <죠스>를 비롯하여 <인디애나 존스>, <AI> 등을 통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문화 콘텐츠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 방식적 전통의 활용이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루스가 가상현실의 RPG 게임에서 다시 한 번 맹활약을 하고 스티븐 킹과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다시금 조우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그저 대상화된 콘텐츠로만 등장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창고 속의 그들이 다시금 현역으로 돌아온 반가움이 크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노익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현역으로 펄펄한 또 한 명의 괴짜 소년이다. 여전한 소년은 말한다. 기술과 독점의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구원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일 뿐이라고. 물론 그의 담론과 주장은 소박하고 낭만적일 지로 모른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낭만이 2018년의 새로운 블록버스터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걸 그냥 어르신의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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