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기(월급의 차별과 편견을 견디는 일 모두 동의 없이 진행)

일상/다양한이야기|2018. 1. 23.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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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당장 내가 안정적인 급여를 받고 있다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안일한 생각으로 만족하며 살기에 세상은 우리에게 변화의 포인트와 갑작스러운 불행을 우리의 동의 없이 진행하기 때문이다.

2018년 대한민국에서는 15세 이상 인구 4384만8000명 중 2684만5000명이 일한다. 1980년 1368만명이던 취업자 수는 국가 주도 개발과 제조업·수출 중심의 경제성장이 결실을 보면서 1985년 1497만명, 1995년 2041만명으로 늘었다. 일하는 이들의 소득도 많아졌다. 나이와 가족 수, 지역과 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낸 전국 노동자의 평균 월급도 극적으로 증가했다. 1980년 한 달 평균 23만4086원을 벌던 근로자가구는 1995년 191만원, 2005년 325만3000원을 벌었다. 2010년 396만5000원, 2015년 478만5000원에 이어 지난해 3분기에는 전체 평균 500만원을 넘겼다.

늘 그렇듯 ‘평균’과 ‘현실’ 사이엔 거리가 있다. 가구 소득 월 500만원이 평균이라는데, 노동자 1명이 평균 잡아 버는 돈은 그에 훨씬 못 미친다. 도시 2인 이상 근로자가구를 기준으로 하위 20% 가구의 월평균 소득이 1990년 20만6000원에서 2016년 71만1000원으로 3.44배 오르는 사이, 상위 20% 가구의 소득은 81만2000원에서 446만원으로 5.5배 늘었다.

불평등도를 측정하는 지니계수는 0.266에서 0.317이 됐다.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에 다가갈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뜻이다. 전체 인구 중 빈곤 위험에 처한 이들의 비율인 상대적 빈곤율은 7.8%에서 15.4%로 뛰어올랐다.

통계로는 알기 힘든 월급의 진실은 개개인의 삶에서 드러난다.

■ 1988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970억달러였는데, 지금 GDP는 1조5297억달러로 17배 늘었다

“기술만 있으면 결혼해서도 얼마든 할 수 있는 게 이 일의 장점”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 배우자를 잃고 재봉틀로 딸을 키웠다. 일이 몰린 달 400만원까지 벌었을 때 “이리 벌면 떼부자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400만원은 “시간을 죽여 번 돈”이었다.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장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1시30분까지 하루 14시간 넘게 일한다. 하지만 물량이 없으면 놀아야 한다. 인건비가 싼 중국·베트남으로 봉제산업이 대거 빠진 뒤로는 정기적인 일감이 없다.

얼마 남지 않은 공장들 중 일부는 서울 창신동과 신당동 등 동대문 인근에 남았는데 그나마도 폐업 행렬을 잇고 있다. 장씨는 “있는 달, 없는 달 평균 내면 월 200만원 정도 번다”고 했다. 지난해 3분기 도시 근로자가구 소득 10분위 중 2분위 월평균 소득이 236만7387원이니, 35년 재봉틀을 돌리고도 하위 20%에 머문 셈이다. 그가 35만원 벌던 1988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970억달러였는데, 장씨가 그때보다 5배 많은 200만원을 버는 지금 GDP는 1조5297억달러로 17배 늘었다.

요즘 봉제시장에서는 젊은 일꾼을 찾아볼 수 없다. 2015년 의류산업협회 분석을 보면 봉제사의 94%가 40대 이상이었다. 장씨는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하는 특성 때문에 나가떨어지는 언니·동생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일감이 넘쳤던 1980년대는 지금 와서 보면 행복했다”며 “내일 당장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더 싫다”고 말했다. 그는 딸과 둘이 살면서 식비·교통비·통신비와 각종 공과금 등 생활비로 약 100만원, 저축과 보험 등에 70만원을 쓰고 나머지 30만원을 월세로 낸다.

■ 한국의 저임금 노동시장이 걸어온 길

2017년 기준으로 한국에서는 남성 10명 중 7명이, 여성 10명 중 5명이 일한다. 1980년에도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이미 42.8%였다. 1993년 임금구조 기본통계 조사보고서를 보면 당시 여성 노동자 144만4600명이 받은 월평균 49만500원의 임금은 남성 평균 임금의 절반이 겨우 넘었다. 장씨 같은 여공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군 동력이었다. 고령화사회에 한국 노동자들의 가장 일반적인 미래 또한 ‘여성’ ‘저임금’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저임금 노동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이들의 과거는 그간 한국의 저임금 노동시장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다.

1999년 SH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지은 공공임대주택에 보증금 850만원에 최금옥씨(58)는 ‘국민학교’ 3학년부터 아버지와 동생 둘의 살림을 맡았다. 1979년 결혼 후 부업을 시작했는데, 면장갑을 코바늘로 꿰고 하루 30원을 벌었다. 최씨는 “당시 두부 한 모가 15원, 라면 한 개가 20원이라 애들 계란 하나 사먹인다는 생각으로 했다”고 기억했다. 배우자는 석공으로 일하며 한 달 5만원을 벌었는데 방세 3000원과 식비, 전기료, 연탄값 등을 치르면 1만원 저축하기도 빠듯했다. 옆집 살던 교사가 매달 17만원씩 받는 걸 본 최씨는 ‘저리 벌면 금방 집 사겠다’ 싶어 서울 신촌 막국숫집, 춘천 봉제공장, 인천 제조업 공장 등에서 생업에 뛰어들었다. 지하철·버스 자동문 부속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콘비아(컨베이어벨트)를 타기도” 했고 가정용 인터폰 렌즈 초점을 사람 눈에 가장 잘 보이게 조정하는 일도 했다.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인천대학교에 오기 전까지 구립 어린이집에서 10년간 일했다. 밥을 하려면 LPG통을 이어 불을 붙여야 했는데 겁이 많은 최씨는 “나 이거 무서워서 못하겠다. 한두 달만 일할 테니 다른 사람 구해달라”고 원장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그러다 10년이 지나갔고, 월급은 8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올랐다. 2005년 소득 3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이 105만원, 2분위 가구 소득은 85만원이었으니 최씨는 하위 30%에 속했다. 2005년의 100만원은 지금의 128만원이었다.

아이들이 줄어들면서 최씨가 다니던 어린이집은 다른 곳과 통폐합됐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2005년, 최씨는 46살에 인천대에서 용역노동자로 청소를 시작했다. 월급은 70만원(지금의 90만900원)으로 떨어졌다. 그때까지 대학이 직접고용한 미화원이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최씨와 함께 일하며 3배의 월급과 각종 수당을 받았다. 정년이 다 된 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떠나는 동안 학교는 새 직원을 뽑지 않았고 그 빈자리는 용역이 채웠다. 최씨도 직장을 옮기며 소득 분위가 3분위에서 2분위로 한 계단 내려갔다.

12년차 고참인 최씨는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집을 나선다. 63번 버스를 타고 인천 주안역까지 나와 버스를 갈아타고 인천대 송도캠퍼스에 도착하면 오전 6시20분.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누룽지를 끓여먹고 오전 7시에 강의실로 올라간다. 학생들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미화원 2명이 5층 공과대 건물을 깨끗이 치워야 한다.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아침에 마주하는 일터는 반갑지 않다. 강의실 문을 열면 강단 바닥에 붙은 분필 부스러기와 황사처럼 뿌연 칠판이 최씨를 맞는다. 책상 곳곳에 남은 커피잔과 음료수 캔, 버려진 종이와 휴지를 쓸어담을 때마다 “쏟은 음료는 없었으면”이라고 되뇐다.

강의실은 낫다. 화장실 청소는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피로를 동시에 준다. ‘똥지’를 치우고 변기와 바닥, 세면대를 락스 묻힌 수세미와 마른걸레로 세 번씩 닦아야 멀쩡한 모습이 된다. 강의실 8개와 화장실 10곳을 치우면 오전 10시50분. 잠깐 쉬었다 점심을 먹은 뒤 낮 12시30분에 다시 화장실을 돌면서 중노동이 시작된다. 수업이 한창일 땐 강의실 대신 계단 청소가 기다리고 있다. 5층 건물을 오르내리다 보면 하루가 저문다.

지난해 12월 최씨는 근로소득세와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을 떼고 152만5380원을 받았다. 2014년에는 10만원 삭감됐고 2015년에는 동결됐었다. 한 번은 월급이 안 나와 학교 본부를 찾아갔더니 “당신네 회사 가서 받으라”고 했다. 학교는 인천에 있는데 용역회사는 대구에 있었다. 용역회사는 지금도 제주·광주·부산·전주 등 전국을 돌며 1년에 한 번씩 바뀐다. “교섭하다 보면 1년이 다 간다. 딱 2년만 협상 없이 제대로 된 월급 좀 받아봤으면 좋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최씨의 월급이 2005년 83만원에서 2017년 152만원으로 12년 만에 69만원(83%) 오를 때, 통계청이 조사하는 김치찌개백반의 소비자 물가지수는 74.51에서 103.73이 됐다. 2015년을 100으로 치고 환산한 것이다.

■ 차별과 편견을 견디는 일 모두 동의 없이 진행됐다.

김치찌개백반이 1.4배 오르는 동안 최씨의 월급은 1.8배 올랐다. 하지만 최씨는 여전히 교통비를 아끼려 뛰어서 지하철·버스를 갈아타거나 환승비 300원을 아끼려고 바둥댄다. 지난해 3분기 근로자가구 하위 10%는 141만3000원을 벌었다. 어린이집 다닐 때와 비교하면 최씨의 소득은 하위 30%에서 하위 10%에 가까워졌다. 같은 기간 초임 사무관이 연금·각종 수당을 제외하고 받는 월급은 109만3800원에서 240만3500원으로 2.19배 올랐다.

일하는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생활 수준이 후퇴하는 것, 오래 일하고 적게 받는 것만이 아니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이 되는 일, 멋대로 임금이 깎이는 일, 차별과 편견을 견디는 일 모두 동의 없이 진행됐다.

강옥자씨(60)는 1987년 처음 김포공항에서 청소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정규직이었고 호봉을 인정받으며 월급 100만원가량을 받았다. 월급만큼 좋았던 것은 800% 상여금과 연말 보너스, 학자금 지원과 정규직 직원들이 가입할 수 있었던 주택조합 등이었다.

이 모든 혜택은 근무 10년차인 1997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당신들은 이제 용역회사의 직원입니다”라는 통보와 함께, 첫 달 명세서에 찍힌 급여는 60만원으로 떨어졌다. 20년 전 월급 액수를 그는 또렷이 기억했다. 월급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는 충격도 컸지만 네 식구가 도저히 생계를 이을 수 없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168만원이던 월급이 100만원으로 떨어진 것과 같다. 강씨는 퇴근 후 식당에서 5시간 서빙과 설거지를 하는 ‘알바’를 하면서 일당 3만원씩을 받아 수입을 메웠다.

2003년 김포공항에 다시 국제선이 취항하면서 새로 들어온 용역회사는 월급 120만원을 줬다. 지금 강씨는 본사 사무실을 담당하면서 약 170만원을 받고 있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가 1.37배 오른 걸 감안하면 월급은 제자리다. 지난달 28일 오전 7시 강씨는 본사 임원실을 청소하다 승진 후 처음 출근한 ㄱ실장과 마주쳤다. 낯익은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니 1987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총무과에서 근무하던 직원이었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밀려난 강씨의 월급이 50만원 오르는 사이 한국공항공사 정규직 직원들의 평균 임금은 얼마나 올랐을까. 강씨는 “지금 받는 170만원보다 2003년 받은 120만원이 더 컸다”며 “공항 구석구석 내 손 안 닿은 곳이 없는데, 사람한테는 안 고마워도 이 바닥, 내가 닦아온 바닥한테는 고맙더라”고 했다.

 

■ 급여는 감소했는데, 일하는 시간은 줄지 않았다.

텔레마케터를 그만둔 김명희씨는 2006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했다. 2016년까지 하루 두 케이스(가사간병 4시간+장기요양 4시간)를 맡아 110만~120만원을 벌었으나 2017년 3월 정부 정책이 바뀐 뒤 근무시간이 한 케이스당 3시간으로 줄었다. 급여는 90만원으로 감소했는데, 실제로 김씨가 일하는 시간은 줄지 않았다.

90만원 중 매달 들어가는 적금과 보험료 50만원을 빼면 김씨가 쓸 수 있는 돈은 40만원이다. 자식들이 보태주는 돈을 생활비로 썼는데 자식들까지 병가와 이직을 하면서 용돈이 끊겼다. 김씨는 “수입이 한 달 끊기면 여파가 3개월 간다”고 했다. 일이 끊겨 못낸 11월 공과금은 12월에 번 돈으로 납부하고, 1월에 정산이 된다. 텔레마케터를 하며 하위 20%로 내려갔던 그의 소득은 지금 하위 10%다.

‘모멸’은 월급이 되지 않는다. 김씨가 중국집과 오리고깃집에서 일할 때 진상 손님도 적지 않았다. 50~60대가 둘러앉은 단골 테이블에 음식을 날랐던 날, 술이 취한 그들은 “돈을 줄 테니 노래를 하라”고 시켰다. 취객들은 김씨에게 술을 따르라고 시키거나 억지로 술을 마시게 했다. 김씨는 “저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치는 걸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봉제사 장경하씨도 마찬가지였다. 궁핍한 집안에 돈을 보태려고 평화시장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어렸고 충분히 배울 기회도 없었다. 관리자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말이 많아” “엄마아빠가 그렇게 가르치디” “어디 싸가지 없게 눈을 똑바로 봐”라는 거친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최저임금이 오르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지만, 이들이 바라는 월급은 그리 많지 않다. 김명희씨는 “일하는 시간을 더 늘려도 되니 한 달에 150만원은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몸이 허락하는 한 요양보호사로 계속 일을 할 생각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해봤지만 지금 하는 일이 나에게는 천직”이라고 했다.

청소노동자 최금옥씨는 지금보다 40만원을 더한 190만원을 원한다. 배우자와 함께 ‘소파 하나 들일 수 있는 좀 더 넓은 집’으로 가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30년 가까이 산 19평 전세 아파트도 내외가 살기에 크게 불편하진 않지만 거실에 소파를 들일 정도로 넓지는 않다. 최씨는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65세인 남편도 공공기관 청소 일을 한다. 정부가 내년부터 공공부문 비정규직들을 정규직으로 해준다 했지만 나이가 많아 적용 대상이 아니다. 최씨는 “자식 뒷바라지 끝에 노후 대책은 이제 시작인데, 몸은 멀쩡하지만 나이가 다 돼 일을 관둬야 한다”며 걱정했다.

“인정받으며 살아보고 싶다”

김포공항에서 일하는 강옥자씨는 지금보다 30만원 늘어난 200만원을 희망했다. “열심히 공부해 들어온 정규직만큼 많이 받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일한 만큼, 나라에서 주라는 만큼, 용역회사가 떼가는 만큼은 받고 싶다는 것”이라고 했다. 월급이 늘어나면 퇴직한 뒤에는 학교에 가려고 한다. “국민학교부터 다니고 싶어요. 평생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은 멍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장경하씨도 학교에 다시 가서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인정받는 아이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할 때 대학생들이 꾸린 야학에 다녀본 것이 전부인 그는 요즘 시를 쓴다. “평생 나를 위해 쓴 시간이 없어서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는데, 글을 쓰면서는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요.” 시를 쓰는 소소한 즐거움과 딸의 행복, 바라는 것이 많지 않은 장씨는 “많은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일이 안정적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한민국이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를 늘리면 GDP를 10%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9월 한국을 찾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노동인구에서 여성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30년 만에 ‘10명 중 4명’에서 ‘10명 중 5명’으로 늘어난 이들이 ‘10명 중 6명’으로 오르면 저임금과 불안정고용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경제가 성장할 때 일하는 이들의 월급은 함께 올랐고, 경제가 휘청일 때 나란히 저임금의 질곡에 빠졌다. 이들의 삶을 통해 본 월급의 역사에서는, 꾸준히 시장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늘어남에도 ‘전체 파이가 커지는 것’과 ‘개인의 삶이 나아지는 것’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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